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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0 14:06:56

박의장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무의공(武毅公)
박의장
朴毅長
출생 1555년(명종 10년)
경상도 영해부 원구리
(現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사망 1615년(광해군 7년) (향년 60세)
시호 무의(武毅)
본관 무안 박씨
사강(士剛)
청신재(淸愼齋)
가족 부친 박세렴(朴世廉)
모친 영양 남씨(英陽 南氏)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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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강(士剛), 시호는 무의공(武毅公).
할아버지는 증 공조참의 박영기(朴榮基), 아버지는 현감 박세렴(朴世廉), 어머니는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남시준(南時俊)의 딸이다.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며, 경사(經史)에도 밝았다.

2. 생애

1555년 경상도 영해부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1577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579년  훈련원봉사참군, 1588년 진해현감을 거쳐 1592년 경주판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각과 함께 동래성에 구원병으로 출정하였는데, 이각이 도주를 하자 그의 비겁함을 비판했다. 그후 장기군수 이수일과 함께 박진을 도와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는데,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여 명과 함께 대구 파잠(巴岑)에서 전공을 세웠고, 5월에는 울산군수 김태허와 함께 울산의 적을 쳐서 왜적을 무찌른 전공을 세웠으며, 이 공으로 당상관에 특진되면서 경주부윤이 되었다.[1] 같은 해 7월에는 초산군의 왜적을 무찔렀다. 1594년 2월에는 양산에서, 3월에는 언양에서, 5월에는 기장에서, 7월에는 경주에서 왜적들을 제거하였다.

1595년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1597년에는 화왕성전투, 안강전투도산성전투에 참전하였다. 1598년 다시 가의대부로 품계가 올랐고, 1599년 성주목사 겸 방어사, 1600년 경상좌병사, 1601년 인동부사를 지냈고, 1602년 다시 경상좌병사를 거쳐 경상좌수사로 승진하였으나 재임 도중 사망했다.

사후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경상북도 영해의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되었다.


[1] 무려 7년간 재임하여 역대 경주부윤 중 최장기간 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