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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56:12

박석훈

1. 담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석훈2. 강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석훈

1. 담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석훈

성명 박석훈(朴錫塤)
생몰 1909년 7월 1일 ~ 1962년 8월 10일
출생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만월리
사망지 전라남도 담양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석훈은 1909년 7월 1일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만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6월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모임을 갖고 항일학생결사인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는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 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해체된 후 이를 계승하여 1929년 6월에 확대 개편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되었다. 독서회는 전 회원을 5개조로 나누고 각 조별로 연구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광주고보생의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금고 4개월, 짐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독서회에 가담한 혐의에 대해서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담양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2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석훈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강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석훈

성명 박석훈(朴錫薰)
생몰 1883년 11월 30일 ~ 1919년 11월 15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발산리
사망지 평양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석훈은 1883년 11월 3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감리회 목사였으며, 1919년 당시엔 평양 남산현 교회 부담임 목사를 맡았다. 1919년 2월 말, 신홍식은 그에게 태극기를 제작하여 평양에서 발발할 독립만세시위를 지휘하게 한 뒤 자신은 서울로 가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 그는 3월 1일 남산현교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이 시기 광성학교 학생과 숭의학교 학생들도 뒤따라 궐기했고, 세 곳의 시위대는 곧 합세한 뒤 평양 시내를 행진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1월 15일 평양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석훈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