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공근(朴恭根) |
생몰 | 1901년 2월 14일 ~ ? |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공근은 1901년 2월 14일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나주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25년 2월 8일 나주에서 결성된 효종단(曉鍾團)의 위원을 맡았고, 뒤이어 나주청년회(羅州靑年會) 의연금 모취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1925년 4월에는 서울청년회에서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위원을 맡았으며, 1926년 2월에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집행위원, 1926년 11월에 나주청년수양회(羅州靑年修養會)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1927년 9월 7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이 성립되자 조선농민총동맹 전남지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서무부장, 지회장 등을 역임했고,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나주 지역에서 학생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나주지회에서 같이 활동한 양영택, 박동희(朴東熙), 나주농업보습학원(羅州農業補習學院) 학생인 유찬옥, 홍민후(洪敏厚) 등의 동지들과 함께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강압과 폭압을 받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 인쇄하고 학생 동원계획을 세웠다.
1929년 11월 27일, 박공근은 나주 시장에서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을 규합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신간회가 해소되기 직전인 1931년 5월 16일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박공근이 언제,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박공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