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3:57:37

바트 지아마티

{{{#!wiki style="margin-top: -10px; margin-bottom: -10px"<tablebordercolor=#001840><tablebgcolor=#001840>
파일:MLB 로고.svg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D1D1D,#E2E2E2
1920년 ~ 현재
초대
케네소 랜디스
파일:미국 국기.svg
1920~1944
2대
해피 챈들러
파일:미국 국기.svg
1945~1951
3대
포드 프릭
파일:미국 국기.svg
1951~1965
4대
윌리엄 에커트
파일:미국 국기.svg
1965~1968
5대
보위 쿤
파일:미국 국기.svg
1969~1984
6대
피터 웨베로스
파일:미국 국기.svg
1984~1989
7대
바트 지아마티
파일:미국 국기.svg
1989
8대
페이 빈센트
파일:미국 국기.svg
1989~1992
9대
버드 셀릭
파일:미국 국기.svg
1992~2015
10대
롭 맨프레드
파일:미국 국기.svg
2015~
}}}}}}}}}}}}}}} ||

<colbgcolor=#001840><colcolor=#fff> 파일:MLB 로고.svg 제7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앤젤로 바틀렛 "바트" 지아마티
Angelo Bartlett “Bart” Giamatti
파일:archive-1989-bart-giamatti.jpg
출생 1938년 4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사망 1989년 9월 1일 (향년 51세)
미국 매사추세츠 오크 블러프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예일 대학교(B.A. · Ph.D.)[1]
경력 제19대 예일 대학교 총장 (1978~1986)
제14대 내셔널 리그 회장 (1986~1989)
제7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1989)[2]
가족 아들 폴 지아마티


1. 개요2. 생애
2.1. 예일대 교수 시절2.2. 야구인 시절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문학 교수 겸 체육 행정가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7대 커미셔너를 지냈다.

2. 생애

2.1. 예일대 교수 시절

조부모가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계 미국인 혈통이다.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에서 문학 교수로 역임하는 밸런타인 지아마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예일 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64년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직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문학 강사로 잠깐 부임했다가, 1966년 모교로 돌아와 영문과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1971년 정교수가 되었다.주 연구분야는 영국 르네상스 문학이다. 1975년 인문학부장 역임에 이어 1978년 6월 예일 대학교 19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3]

총장 재임 시절인 1984-1985년에 교직원들의 파업이 발생하자, 강경대응을 통해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는 후에 커미셔너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 야구인 시절

지아마티는 열렬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이었고, 예일대 교수로 역임 중에도 아메리칸 리그 회장이 되고싶다는 등의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인 1986년 6월 제14대 내셔널 리그 회장에 이어 1989년 4월 1일부로 제7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로 선출되며 야구계에 종사하게 된다. 커미셔너 취임 후 부 커미셔너(Deputy Commissioner) 직함을 새로이 만들었고, 페이 빈센트를 임명하였다.

내셔널 리그 회장 재직 중이던 1988년 4월 30일,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 피트 로즈가 심판 데이브 팰런을 밀쳐 얼굴에 상처를 낸 사건이 일어나자, 지아마티는 피트 로즈에게 30일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다. 1988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도중에는 LA 다저스 소속 투수 제이 하웰파인타르를 사용한 것이 적발되자 3일 출장 정지 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예일 대학교 총장 시절 노조파업에 대한 강경한 대처가 메이저 리그 야구 구단주들에게 호의적인 인상을 남겼던 지아마티는 1988년 9월 8일 만장일치로 차기 커미셔너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4월 1일부로 임기를 시작했다. 커미셔너 임기 중 가장 인상 깊은 사건으로 1989년 8월 24일 불법배팅 의혹을 받아오던 피트 로즈의 영구제명이 있다.

하지만 1989년 9월 1일 심장마비로 급사하면서 154일 간의 짧았던 커머셔너 임기가 종료되었다. 임기 중 사망한 두 번째 커미셔너이며, 역대 최단기 임기만을 소화한 커미셔너가 되었다. 후임은 부 커미셔너인 페이 빈센트가 승계하였다. 이후 1989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그를 기리고자 아들 마커스 지아마티가 시구를 맡았고, 모교 예일 대학교의 아카펠라 중창단인 The Whiffenpoofs가 국가를 부르며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1] 1960년 영문학 학사, 1964년 비교문학 박사[2] 154일 재임, 역대 최단기 임기 커미셔너[3] 당시 만 39세로 최연소 총장 부임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