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 파우어의 역임 직책 | |||||
{{{#!folding ▼ | 네덜란드 축구 국가 대표팀 역대 주장 | ||||
아드리안 판말러 (1940) | → | 바스 파우어 (1940~1946) | → | 키크 스미트 (1946) | |
키크 스미트 (1946) | → | 바스 파우어 (1946) | → | 헹크 판데르린던 (1947) |
이름 | 바스티안 야코프 "바스" 파우어 (Bastiaan Jacob "Baas" Paauwe) |
생년월일 | 1911년 10월 4일 |
사망년월일 | 1989년 2월 27일 (향년 77세) |
국적 | 네덜란드 |
출신지 | 로테르담 |
포지션 | 라이트 윙 하프백 |
신체조건 | 168cm / 66kg |
등번호 | -[1] |
소속팀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29-1947) |
감독 | 엔스헤데서 보이스 (1960-1962) FC 바허닝헌 (1964-1968) VVV 펜로 (1968-1969) SC 헤이렌베인 (1969-1971) SC 아메르스포르트 (1972-1973) |
국가대표 | 31경기 1골 (1932-1946) |
1. 개요
네덜란드의 전 축구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파우어는 1929년에 18세의 나이로 페예노르트 1군에 데뷔했다. 이 무렵 바스는 그의 형제들 중 3명과 함께 같은 페예노르트에 속해 있었는데 그 중 두 살 위의 형 야프와 가장 자주 같이 뛰었다.1944년 스파르타 로테르담과의 더비 매치에서 파우어는 페널티 킥 실축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팀은 파우어의 실축에도 불구하고 4대3으로 승리했다.
그는 17시즌 반을 페예노르트에서 뛰면서 총 311경기의 리그 출전과 18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판헤일의 은퇴 이후엔 페예노르트의 주장도 역임했으며 총 3회의 리그 우승과 2회의 컵 대회 우승을 경험했다.
파우어의 마지막 시합은 1947년 5월 11일의 더 클라시케르였고 페예노르트는 1대1로 비겼다.
2.1.2. 국가대표팀
파우어의 국가대표팀 첫 선발은 1931년이었다. 원래 판헤일과 그의 형 야프와 함께 하프백 라인을 꾸려 출전하는 것이 유력했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그의 데뷔전은 1932년으로 미뤄졌다. 상대는 아일랜드 자유 주였으며 이번에는 야프의 부상으로 대체 선발이 되었으며 여기서 판헤일, 안데리선과 하프백 라인을 이뤘다.처음에는 국가대표팀에서 라이트 윙 하프가 어울리지 않아 경기 직전에 헹크 펠리칸과 라이트 윙 하프 자리에서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다. 이후 2년여 동안 대표팀에서 뛰지 못하고 교체 선수로 머물렀고 1934년 월드컵에서도 벤치를 지켰다.
결국 1934년 11월, 스위스전을 앞두고 펠리칸이 부상으로 빠지게 되자 파우어가 다시 라이트 윙 하프 자리를 차지했다.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스위스에 4대2로 승리하여 월드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했으며 판헤일-안데리선-파우어의 하프백 라인은 이후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4년여간 유지되었다. 1938년 월드컵에도 이 라인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전 대회 준우승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연장 혈투 끝에 0대3으로 패했다.
파우어의 국가대표팀 경기 중 유일한 득점은 1940년에 나왔다. 이 경기는 아버 렌스트라의 데뷔전이기도 한데 룩셈부르크에 4대5로 패한 네덜란드 대표팀의 역대급 개망신 경기였다.
1940년부터 파우어는 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했고 1946년까지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총 31회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2.2. 감독
1935년부터 파우어는 페예노르트의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 리하르트 콘을 롤 모델로 삼았다. 그의 친근하면서 존중을 앞세운 코칭은 파우어에 큰 영향을 주었고 50년대부터 파우어는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그가 처음으로 감독을 맡은 클럽은 엔스헤데서 보이스. 하지만 아버 렌스트라와 팀 장악을 놓고 갈등이 생겼다. 그 이후 4년간 감독직을 맡은 FC 바허닝헌에서는 마지막 4년차에 트베이더 디비시 우승을 이끌었고 파우어는 명예롭게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한 시즌의 VVV 펜로 감독직 이후, SC 헤이렌베인에서는 팀을 트베이더 디비시 우승으로 이끌고 에이르스터 디비시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주로 라이트 하프백에서 뛰었지만 푸크 판헤일, 그의 형 야프 등과 포지션을 바꾸면 센터 하프백에서 뛰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 걸맞게 민첩했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드리블러였다.4. 여담
- 파우어는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기 기술자, 여관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나중엔 그가 일하던 여관 자리에서 카페를 차리기도 했다. 이 카페는 나중에 감독 생활을 하면서 정리했다.
5. 수상
5.1. 클럽[3]
- 에레디비시 우승 3회: 1935–36, 1937–38, 1939–40
- KNVB 베이커 우승 2회: 1929–30, 1934–35
- 에레디비시 준우승 5회: 1930-31, 1931-32, 1932-33, 1936-37, 1942-43
- KNVB 베이커 준우승 1회: 1933-34
5.2. 감독
- 트베이더 디비시 우승 2회: 1967-68(FC 바허닝헌), 1969-70(SC 헤이렌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