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62대 버지니아 주지사 밀스 에드윈 고드윈 주니어 Mills Edwin Godwin Jr. | |
<colbgcolor=#00297b><colcolor=#fff> 출생 | 1914년 11월 19일 |
미국 버지니아주 처카턱 | |
사망 | 1999년 1월 30일 (향년 84세) |
미국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 | |
국적 | 미국 |
재임기간 | 제60,62대 버지니아 주지사 |
1966년 1월 15일 ~ 1970년 1월 17일 1기 | |
1974년 1월 12일 ~ 1978년 1월 14일 2기 | |
제28대 버지니아 부지사 | |
1962년 1월 13일 ~ 1966년 1월 15일 | |
정당 | (1973년 이전) (1973~1999) |
학력 |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L.L.B.) |
가족 | 배우자 캐서린 고드윈 (1940년 결혼) |
종교 | 기독교 |
서명 |
[Clearfix]
1. 개요
버지니아 주정부 공식 초상화[1] |
2. 생애
고드윈은 버지니아의 소도시인 처카턱에서 태어나 주에 위치한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와 버지니아 대학교를 다녔다. 졸업 이후에는 FBI 요원과 변호사를 직업으로 가졌다. 그는 해리 F. 버드의 버드 조직의 일원으로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주의원 임기 중 버드 상원의원이 주도한 인종통합,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 반대 운동인 "대규모 저항" 운동에도 가담한다.[2]하지만 5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 정책이 미래가 없다[3]는 것을 인지한 그는 점점 입장을 완화한다. 부지사 임기 중인 1964년에는 린든 B. 존슨을 지지하며 버드 조직 민주당원 이미지를 청산하며 흑인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 호감을 산다. 1년 후, 버지니아 주지사로 출마하여 린우드 홀튼(Linwood Holton)[4] 공화당 후보와 윌리엄 J. 스토리 주니어(William J. Story Jr) 버지니아 보수당[5] 후보, 조지 링컨 록웰 미국 나치당 후보[6]를 이기고 당선된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의 그의 주지사 1기 임기는 주민들의 포괄적인 지지를 얻었다. 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해리 F. 버드가 만든 지나친 재정보수주의적 정책을 폐지하고 판매세를 신설했다. 교육에서는 버지니아주 커뮤니티 칼리지 시스템을 구축, 공립학교를 개선하고 교사 급여 인상을 위해 7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민권 분야에서도 쿠 클럭스 클랜을 견제하고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 제한 조치를 해제하였다.
하지만 고드윈은 근본적으로 보수주의 민주당원이었고 당이 너무 진보좌파화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0년 민주당을 탈당한 해리 F. 버드 주니어의 상원의원 캠페인을 돕는 것 같이 당과 점점 엇나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맥거번이 전당대회에서 승리하자 지지를 거부하고 존 코널리의 닉슨을 위한 민주당에 가입한다.
이 시기의 버지니아에서는 1969년 린우드 홀튼이 20세기 최초의 공화당 주지사로 당선되는 것처럼 급격한 정계 개편이 일어나고 있었다.[7] 1971년 부지사 보궐선거에서는 무소속 정치인 헨리 하월(Henry Howell)이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하월은 대중주의자라고 자칭했지만 보수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에게는 진보좌파로 보일 뿐이었다. 노동자,애팔래치아 산맥 지역과 흑인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은 하월은 1973년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고[8], 고드윈은 하월의 당선을 막기 위해 정당을 공화당으로 바꾸어 출마한다. 선거는 박빙이었지만 1.4%p의 차이로 고드윈이 비연속 재선에 성공한다.[9]
그러나 그의 2기 임기는 경제 침체로 인해 고평가를 받지 못했고 주 예산을 불가피하게 삭감하기도 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선에서 제럴드 포드를 지지했지만 주 대표단은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하였다. 2기 임기가 끝나고는 정계를 은퇴하고 경제계에 진출하여 여러 기업의 이사직을 맡았다. 1999년 뉴포트 뉴스의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고드윈의 이름은 밀스 E. 고드윈 고등학교 등에 남아 있다.[10]
남부 민주당원 출신 공화당원이었던 고드윈의 행보는 1950년대~1970년대의 버지니아주의 정치 변화 과도기를 보여준다. 실제로 그의 임기 이후부터 2008년 대선 이전까지 버지니아주는 남부의 대표적인 공화당 우세 지역으로 간주된다. 또한 주 공화당도 민주당의 진보화에 반발한 구 버드 조직 민주당원들이 대거 가입하며 보수화된다. 정치 경력 중반부부터는 인종분리 성향을 포기했지만 버드가 주도한 "대규모 저항" 지지를 죽을때까지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고 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1973 | 입당 | |
| 1973~1999 | 입당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7 | 미국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선거 | 버지니아주 낸스먼드,서퍽 카운티 | | 1,541 (100.00%) | 당선 (1위) | 초선 |
1949 | 미국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선거 | 1,604 (100.00%) | 재선 | |||
1951 | 미국 버지니아주 하원의원 선거 | 1,462 (100.00%) | 3선 | |||
1952 | 미국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보궐선거 | 버지니아주 5구 | - (-%) | 초선 | ||
1955 | 미국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 5,149 (100.00%) | 재선 | |||
1959 | 미국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 5,996 (99.90%) | 3선 | |||
1961 | 미국 부지사 선거 | 버지니아 | 251,223 (65.65%) | 초선 | ||
1965 | 미국 주지사 선거 | 269,526 (47.89%) | ||||
1973 | 미국 주지사 선거 | | 525,075 (50.71%) | 재선 |
[1] 원래는 이 초상화를 사용했으나 2기 임기가 끝날 즈음 사비를 들여 초상화를 교체한다.[2] 말년에 그는 이 행보가 지역구의 정치 성향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변명하면서, 인종 통합이 더 빨리 이뤄졌으면 좋았을거라고 말했다.[3] 흑인은 물론이고 가난한 백인마저 유권자 등록을 막고, 도시 지역의 참정권을 의도적으로 약화하기 위해 한 게리멘더링에 기반을 둔 버드 조직이 지배중인 버지니아의 정치체제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균열중이었다.[4] 버드 조직에 저항하던 공화당원으로 개혁적인 재정정책을 추진했고 자식을 흑인 다수 학교에 보낼 정도로 인종 통합에 솔선수범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인물로는 아칸소 주지사이자 넬슨 록펠러의 동생이었던 윈스롭 록펠러가 있다.[5] 강경파 딕시크랫들이 만든 극우 성향 지역정당, 얼마 안 가 1969년 흐지부지 해산된다.[6] 겨우 1% 받았다...[7] 버지니아 주법은 주지사의 연임을 금지하기 때문에 고드윈은 출마가 불가능했다.[8]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9] 하월은 4년 뒤 민주당에 입당해 주지사직에 재도전하지만 존 N. 달튼(John N. Dalton)에게 더 큰 격차로 낙선한다.[10] 고드윈 중학교도 있었으나 인종차별 논란으로 조지 햄턴 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