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이와모토 에이로(岩本泳魯)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919년 2월 20일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서부동 (현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 |
사망 | 1950년 5월 1일 |
미상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부부위패 7판-188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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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영로는 1919년 2월 20일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서부동(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에서 아버지 민창호(閔昌鎬, 1891 ~ 1968. 10. 17)와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39년 12월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1학년에 재학중 동창생들과 함께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했다. 이후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기르는 한편 동지규합 및 조직 확대 등 독립운동의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국내 학생과 동경 및 해외 유학생 등과 힘을 합해 13도청 소재지 및 중요 도시 중학교에 세포를 조직하여 3.1 운동처럼 거국적으로 거사하기로 하고, 독립선언문의 작성과 임무·담당 등 밀약하였다. 또한 거사 일자를 1942년 3월 중으로 정하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해 삐라를 뿌리며 서울로 합류하며, 동경 히비노(日比野) 공원의 거사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각자 국내의 유지들과 미국유학생과도 연락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자, 겨레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자, 상부상조 우정을 혈맹으로 두터이 하자, 끝까지 일치단결하여 항일투쟁을 행동화 하자, 최후일각까지 절대 비밀 고수하자' 등 5개 행동 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1941년 9월 3일 서울 본부 및 동경 유학생동지회 대표들이 체포되었고, 민영로는 9월 5일 체포된 뒤 1941년 9월 16일부로 퇴학되었으며, 몇달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다. 이후 1944년 1월 일본제국 육군에 징병되어 미얀마에서 근무하다가 탈출한 후 연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미얀마에서 탈출하여 연합군에서 활동했음을 입증할 객관적인 자료가 미비하며, 사망경위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1950년 5월 1일에 사망 신고가 되었을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민영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3월 9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와 그의 부인 전주 이씨 이심원을 기리는 부부 위패를 세웠다.
[1] 입암공파 28세 영(泳)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