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ff><colcolor=#fff> 민애니 | |
본명 | 민신식 |
출생 | 1942년 ([age(1942-01-01)]세)[1] |
서울 서대문구 영천 | |
데뷔 | 꿈을 파는 소녀 (1962) |
링크 |
[clearfix]
1. 개요
초창기 때 생각이, '아, 아이들한테 그 꿈이 있고, 꿈이라는 그 꽃밭에 노란 꽃, 장미꽃, 원추리꽃 진달래 이런 게 다 필 수 있는 그런 정서를 넣어주는 게 만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이겠다.'
대한민국의 어린이 만화, 1세대 순정 만화 작가. 21살에 데뷔하여 수백편의 작품을 만든 만화가다.
80대의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 중이다. 일러스트 작업과 유튜브 원로 순정만화작가 민애니 채널에 드로잉 동영상을 업로드하면서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작품 복원 작업들도 진행되고 있다. 80세 만화가의 하츠네 미쿠 그림과 방탄소년단 그림, 1974년작인 하얀 돛배가 70년대 한국 백합만화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민애니선생님 인터뷰1 만화작가로 데뷔한 계기와 과정
민애니선생님 인터뷰2 과거 한국 만화계의 여러 사정
민애니선생님 인터뷰3 다시 태어나도 만화를
2. 작품
- 꿈을 파는 소녀 (1962)
- 인어 언니 (1962)
- 꿈의 건반 (1971)
- 하얀 돛배 (1974)
- 꽃마음 (1974)
- 여학생남학생 (1976)
- 소녀장군들 (1976)
- 보이지 않는 행복 (1977)
- 과수원길 (1977)
- 세포야 안녕 (2019)
- 마지막 등불
- 행주치마
- 장미와 가시
3. 기타
- 애니라는 이름은 본인의 영미권 이름인 앤의 애칭이다.
- 출판사에서 유행하는 스토리를 요청하면 약 1시간 만에 1권 분량의 스토리를 완성한 뒤 그림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빠른 속도라 한달에 5편 정도의 작품을 낼 정도였고 다른 작가들이 스토리 의뢰를 하면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 남편인 김기백 작가 역시 시대를 풍미한 만화가다. 1935년 생이며 시사만화가에서 시작했으나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철도청을 풍자한 만화로 인하여 필화사건을 겪으며 아동만화가가 되었다. 김영하 화백이 그의 제자였으며 김기백도 당대 유명 만화가였다. 둘리의 아버지 김수정 작가가 중3 때 만화가가 되고자 그를 찾아가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17년 7월 11일 작고.
- 카메라 앞에서 별로 긴장하지 않는 타입이라 방송국 PD들의 섭외 요청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엄희자, 장은주 작가와 함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 검열이 심했던 당시, 남녀의 사랑은 물론이고 우정까지도 검열될 정도였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하얀 돛배 같은 백합 만화들과 여학생남학생 같은 명랑 만화들을 그렸다고 한다. 검열이 너무 심했고[2] 수정을 못하게 원고에 줄을 그어대기까지 해서 하소연하러 오는 만화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요령이 많았던 민애니 작가는 조언을 해주곤 했다고.
- 한국 만화 최초로 미국시장에 진출할 예정이었다. 10년의 공백 이후 처음 낸 작품의 번역본이 반응이 좋았고, 40개 주의 초등학교에 내기로 방향이 잡혔지만 당시 미국 측 출판사가 당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입주해있었고 9.11 테러로 인해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