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民主化實踐家族運動協議會공식 홈페이지
1985년에 창설되어 현재 한국에 잔존하고 있는 양심수들을 석방하기 위한 인권단체. 상징색은 보라색.[1] 약칭 '민가협'. 원래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민청련 사무실 내에 있었지만 1989년 4월부터 명륜동 2가로 옮겼다가 1990년 6월부터 창신2동을 거쳐 2006년경부터 종로구 명륜 3가에 소재 중이다.
산하 기구로는 민가협양심수후원회가 있었으나 2019년 사단법인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만남의 집과 합쳐져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가 됐다.
2. 역사
민가협 20년민가협의 역사는 제4공화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구속자가족 협의회(이하 구가협)'가 그 전신이었다. 당시 초대 회장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였다.
1976년에 재출범한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뒤 1985년 5월 제5공화국 당시에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대학생들이 대거 구속되자 학부모들이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를 결성한 걸 계기로 구속노동자가족협의회·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장기수가족협의회·유가족협의회 등 다른 민주화운동 가족 모임들이 손을 잡고 그해 12월 12일에 남민전 사건,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등 4공화국 시절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던 가족들과 1985년 미문화원 사건,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 사건 등 민주화를 요구하다가 구속된 수많은 학생들의 가족들이 모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창설되었다. 초대 의장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였다.
그러나 민가협은 첫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는데 창설 이후 현판식 과정에서 경찰에게 봉쇄당하고 유치장에 끌려간 것을 시작으로 민가협 소속 어머니들은 양심수 석방을 위해 교도소나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전투경찰, 경비교도대와 몸싸움이 벌어져 급기야는 구속되거나 전경버스에 실려 외딴 곳으로 버려지는 고난을 겪어야 했으며 1992년에는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민가협 사무실이 압수수색되기도 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도 양심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88년에 양심수 문제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대학로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시민가요제'를 개최하고 이근안 국민 현상수배 운동에 나서면서 전두환 구속을 위해 백담사까지 행진하는 데 앞장섰으며, 1989년에는 국민들에게 간첩조작 사건의 실상을 알리고, 진상규명과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간첩조작 이제그만>, <간첩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라는 자료집을 발간하였으며, 10월 23일부터 <전국순회 간첩사건 사례발표회>를 가지면서 장기수 문제를 알렸다.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고 80여명의 장기수들이 석방되고도 나머지 50여명의 장기수들이 석방되지 않자 1990년 대전교도소 장기수 석방 운동과 1992년 여름 명동성당에서의 장기수 석방 농성을 계기로 당시 수감중인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렸고, 이는 1991년 왕영안 옹 석방, 1995년 최장기 장기수(45년) 김선명 옹 등의 석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995~1999년까지 장기수 석방을 위해 '하루감옥체험' 행사를 진행하여 수많은 예술인, 영화배우, 교수, 종교인, 방송인, 시인, 만화가 등 사회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그리하여 1999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비전향 장기수들이 석방되었다.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이후 양심수와 국가보안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민가협은 그해 9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목요집회'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 16일 1천회를 맞이한 바 있었고, 여기서는 양심수나 국가보안법 문제를 비롯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내의 다양한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현안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인권신문고’가 되고자 했다. 또한 목요집회는 국제연대집회, 거리음악제, 퍼포먼스,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를 활용한 선전 등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등의 철폐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사회안전법(1989년), 전향제도(1998년), 준법서약서(2003년)가 폐지되기도 했다. 특히 국정원, 경찰 대공분실, 검찰 공안부, 공안문제연구소(경찰대학 산하기구) 등 공안수사기구에 대한 감시활동과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러한 활동은 2004년 7월에 공안문제연구소의 폐지를 이끌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민가협은 인권이슈를 사회공론화하기 위하여 ‘인권콘서트(2002년까지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 하루감옥체험, 시민가요제, 인권만화전, 인권영화 제작 등 문화적 행동에도 나섰다. 그리고 '양심수는 없다'고 되풀이하는 정부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 양심수 현황 조사', '국가보안법 실태보고서'를 펴내고 있다.
3. 논란
3.1. 노골적인 빨치산 옹호
2005년 5월 28일 전북 회문산에서 열린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전야제(빨치산 추모행사)에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은 “55년 전 우리 선배(先輩)들이 피 흘려 싸웠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적은 55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이다. 산화해 가신 영령들을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해,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루는 계기로 삼자” 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미국을 대한민국의 적이라고 보고 빨치산을 통일애국열사로 지칭하는 종북주의자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기사3.2. 전여옥 의원 폭행 사건
민가협 관계자들은 2009년 2월 27일,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을 폭행했다. 이정이(당시 민가협 부산대표)를 비롯한 민가협 회원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경내에서 혼자 걸어오던 전 의원의 멱살과 머리채를 잡으며 집단폭행했다. 전 前 의원은 이로 인해 왼쪽 눈에 전치 8주의 상처를 입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판사 유환우)은 같은 해 5월29일 이정이와 조순덕(前 민가협 상임대표)에게 각각 징역 10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현장 상황에 대한 증인들의 기억이 모두 다른 상태에서 피해자의 인식을 가장 중요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상해부분은 유죄로, 폭행공모와 폭행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기사3.3. 김정일 조전 발표 논란
2011년 12월 22일 탑골공원에서 열린 869차 목요집회에서 김정일 사망에 따른 조전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민가협 양심수후원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마음 속 깊이 애도하며 영도자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을 북녘 동포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민족끼리 자주적 평화통일로의 이정표를 세우셨음에도 그 자주통일 시대를 보시지 못하고 서거하시어 같은 동포로서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라고 발표하였는데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김정일 사망이라는 표현 대신 김정일 서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김정일이 마치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식의 친북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조전 내용[1] 사실 보라색은 1976년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