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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55:44

미리엄 쿠퍼


미리엄 쿠퍼(Miriam Cooper)
(1891. 11. 07. ~ 1976. 04. 12.)
파일:JXPsnWo.jpg
1915년의 미리엄 쿠퍼
1. 개요2. 생애
2.1. 유년시절2.2. 엑스트라 활동2.3. D. W. 그리피스와의 활동2.4. 라울 월시와의 활동2.5. 은퇴 이후
3. 평가4. 여담5. 필모그래피

1. 개요

미국영화배우, 작가.

2. 생애

2.1. 유년시절

1891년 11월 7일 메릴랜드볼티모어에서 줄리안 쿠퍼와 마거릿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쿠퍼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역사가 깊은 가톨릭 가문의 여인이었고 쿠퍼의 아버지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구아바 사업을 하며 모은 돈을 상속받아서 부유한 삶을 살던 인물이었다. 쿠퍼의 어머니가 5번째 자식을 낳았을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리고 유럽으로 향하면서 쿠퍼 가족의 화목함은 끝이 났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유럽으로 떠난 직후에는 할머니가 워싱턴에 꽤 안락한 아파트를 마련해주어서 다행히도 쿠퍼가는 그럭저럭 잘 지낼수 있었지만 할머니가 사망하고 할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버지가 돈을 가족에게 한푼도 보내기 않았기 때문에 쿠퍼가는 안락하던 삶을 끝내고 워싱턴을 떠나 뉴욕으로 이사를 가야했다.

밤이되면 그녀의 두 형제는 형제끼리, 어머니는 그녀의 여동생과 단둘이 자면서 쿠퍼는 거실의 소파에서 혼자 자야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아프자 고아원에서 지내는 등 가족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악몽과 밤에 대한 공포는 항상 불을 켜놓고 잤을 정도로 죽을때까지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의 자서전[1]에서 자신을 혼자 자도록 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드러나있다.] 이러한 공포를 이겨낼수 있었던 것은 공상뿐이었다. 그녀는 학교 수업 중에도 공상에 빠져서 선생님에게 혼난 일이 많았을정도로 공상에 푹 빠져지냈다. 이러한 공상은 그녀의 배우 커리어에 있어서 엄청난 도움이 되었는데 후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D. W. 그리피스가 나에게 '오빠를 전쟁터에 보내는 남부 소녀' 연기를 주문했을때 나는 그것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소녀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2]

2.2. 엑스트라 활동

1911년 추천으로 쿠퍼 유니언 아트 스쿨을 다니면서 시간당 50센트짜리 모델 일을 하던 미리엄 쿠퍼는.학교가 끝나고 친구와 함께 영화 제작 현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세트장 근처에서 구경을 위해 서성이던 쿠퍼와 친구에게 제작 조수가 다가가 엑스트라를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본다. 친구는 의상이 맘에 들지 않아서 거절하고 한참 집안사정이 좋지 않았던 쿠퍼는 5달러의 일당을 위해 제안을 승낙한다. 그렇게 쿠퍼는 영화 A Blot on the 'Scutcheon 에서 하녀역할을 맡게된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첫 배우 커리어였다. 한편 감독이었던 D. W. 그리피스가 촬영을 마치고 화장을 지우러 가던 쿠퍼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치르게된다. 쿠퍼는 어머니에게 영화에 출연한 것을 들킬까봐 두려워하여 나중에 군것질에 그 5달러를 전부 써버린다. 한편 쿠퍼가 오랜 시간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가 경찰을 부르는 소동이 발생한다.

그리피스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영화로 돈을 버는 것에 관심을 갖고 그녀는 영화를 찍기 위해 플로리다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의견에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던 것은 그녀의 동생이었던 레노어였다고 한다[3] 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했으나 쿠퍼가 10달러를 쥐여주고 주당 15달러를 생활비로 보내겠다고 설득하자 쿠퍼를 보내준다. 플로리다로 간 쿠퍼는 몇몇 스튜디오를 향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1912년 마침내 칼렘 스튜디오에 엑스트라로 고용된다.

칼렙 스튜디오에서 그녀는 당시 종전 50주년이 다가오던 남북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나 로맨스 영화에 주로 출연했는데 여기서 그녀는 수영, 승마, 드럼은 물론, 강을 헤험쳐서 건너거나[4] 기차 위를 달리는 등의 험한 장면을 스턴트 없이도 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배역이 점점 더 위험해짐에 따라 주급 인상을 요구했다가 해고되고 만다.[5] 직장에서 해고됨에 따라 할 일이 없어진 쿠퍼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2.3. D. W. 그리피스와의 활동

스튜디오에서 해고당한 이후 쿠퍼는 모델일을 하며 배우 오디션을 보지만 계속 실패한다. 결국 그녀는 그리피스를 찾기로 결심하고 그리피스와 일하고 있던 바이오그래프 스튜디오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피스와 만나는데 실패하고 매우 실망한채로 학교로 돌아간다. 이 때 그녀는 그곳에서 직업을 구하는 인파 사이에서 자신이 관심을 받지 못한것에 대해 자신이 벽지가 된 것 같았다고 한다.그렇다고 관심종자는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그 스튜디오에서 일하고있던 어떤 젊은 배우를 통해서 그리피스를 만날수 있었다. 사실 그리피스는 쿠퍼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만나기를 원했지만 쿠퍼의 집에 전화가 없어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피스는 5번에 걸쳐 그녀를 사무실로 부른다. 마지막 호출은 오디션을 하고자 함이었는데 오디션의 주제는 '애인을 전쟁터로 보내는 여자'였다고 한다. 아마도 1915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국가의 탄생을 위한 오디션이었던걸로 보인다. 그리피스는 이후 쿠퍼에게 캘리포니아로 떠난다는 언질을 주었고 그녀는 10달러[6]만을 갖고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그후 1914년작인 Home, sweet home 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피스와 호흡을 맞추게된[7] 쿠퍼는 1915년작 국가의 탄생 에서 주연급 역을 맡게 된다. 이때 쿠퍼는 남부 부호의 딸인 마거릿 캐머런으로 등장하며 '무성영화의 여신'이라 불릴 정도로 당시 가장 인기있던 여배우인 릴리안 기쉬와 함께 연기한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됐을때 정작 쿠퍼는 아팠기 때문에 개봉되고 꽤 돼서야 영화를 봤다고 한다.
파일:mUS8e94r.jpg 파일:iv29oZu.jpg
Home, sweet home (1914)에서. 가운데가 쿠퍼이다. 국가의 탄생 에서의 쿠퍼.
1916년 개봉한 국가의 탄생'의 후속작인 인톨러런스(Intolerence) 에서는 '외로운 여자' 역을 맡았다. 비록 인톨러런스는 그 당시로서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인종차별요소가 들어간 국가의 탄생 보다 좋은 평을 받게 된다. 한편 인톨러런스를 촬영하는 동안 쿠퍼는 그리피스의 조감독인 라울 월시와 눈이 맞게 된고 인톨러런스 촬영이 끝나기 전 월시와 애리조나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은밀하게 결혼한다. 월시와 결혼한 쿠퍼는 뉴욕에서 일하는 월시와 달리 정반대의 캘리포니아에서 일하던 쿠퍼는 그리피스의 영화사에서 떠날것을 결심하지만 선뜻 그 뜻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리피스가 '인톨러런스'의 후속작이라며 내민 이해할 수 없이 난해한 대본을 읽어본 그녀는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것으로 결심하고 조용히 짐을 싸 캘리포니아를 떠난다. 쿠퍼가 야반도주한 것을 알게 된 그리피스는 오히려 결혼 축하 전보를 보낸다.

2.4. 라울 월시와의 활동

월시와 결혼을 하게 되자 영화에 열의와 흥미가 꺾이게 된 그녀는 배우를 그만두는 것을 생각했지만 남편의 설득으로 함께 다시 영화를 찍게 된다. 이때 월시는 그리피스와 결별하고 폭스 영화사[8]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후 쿠퍼는 남편이 제작사를 옮겨다닐 때마다 소속을 계속해서 바꾸게 되고 그녀는 어느새 주당 1000달러를 받는 여배우가 되었다. 1919년에는 그녀의 영화 중 훌륭하다는 평을 듣는 'Evangeline 에 출연하게 된다.

그러나 치솟는 유명세와 반대로 그녀는 영화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영화계를 떠나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결국 1920년의 The Oath 의 실패 후 그녀는 성공과 실패를 오고가다가 1923년작인 The broken wing 을 촬영하고 영화를 보고난 뒤 최악이라고 생각해서 울었을 정도로 영화의 완성도에 좌절하고 영화계를 은퇴한다.[9] 이후 남편과 1925년에 이혼한 그녀는 다시는 영화를 보지 않았고 죽을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2.5. 은퇴 이후

이혼 후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브릿지 카드놀이와 쇼핑을 즐기며 소일하면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또한 글쓰기에 치중하여 소설과 몇편의 희곡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십자에 자원해 봉사활동을 했다.1953년에는 버지니아 주로 이사를 가서 글쓰기 클럽에서 글도 쓰고 골프, 자선, 카드게임 등을 즐기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동안 배우로 활동하며 모아온 어마어마한 돈이 있기에 50년간의 운둔생활에서도 유년 시절처럼 크게 가난한 생활은 하지 않았으며 기나긴 은둔생활에서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즐겼다고 한다.

한편 여러 대학교와 영화사학자들 사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그녀는 1970년 그리피스 영화제에 참석하는데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제 중간에 발생한 심장마비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1973년 자서전 <Dark lady of the silents>를 출판했다. 1976년 4월 12일 살고있던 버지니아 샬러스빌에서 뇌출혈로 84세에 사망한 쿠퍼는 고향 볼티모어에 '미리엄 쿠퍼 월시'라는 이름으로 묻힌다.

파일:external/image2.findagrave.com/8452689_113595276269.jpg 쿠퍼의 묘비[10]

3. 평가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탄생 Intolerence 의 배우로 알려져있다.

다만 그녀는 한국은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1950년대에 배우로써 재기에 성공한 릴리안 기쉬와 버스터 키튼과는 다르게 그녀는 아예 스크린 출연 자체를 꺼렸기 때문에 70년대 이전에는 거의 잊혀진 배우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녀가 유성영화가 나오기도 전에 일찌감찌 은퇴했기 때문에 그녀의 노년생활 시절 사진은 물론이고[11] 그녀의 목소리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70년대에 대학교 강의를 몇번 했다고 하던데 현재로써는 그런 영상을 찾기 어렵다. 자료가 적음에 따라 그녀에 대한 연구는 그녀의 자서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연구란게 있는지도 알수없다.

4. 여담

5. 필모그래피

그녀는 엑스트라 시절을 포함해 10여년의 짧은 활동 중 5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으나 필름이 현존하는 영화는 10편이 채 되지 않는다[13]. 목록은 엑스트라 시절부터 등장하는 영화 중 현존하는 영화의 목록이다.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1916년 1922년 1923년

[1] 1973년에 쓴 Dark lady of the silents[2] Dark lady of the silents(1973), p.19[3] "가족 중에 영화배우가 있으면 재미있겠다."라고 했다.[4] 그녀의 집안 사람들이 모두 수영을 잘한 모양이다. 그녀의 오빠는 허드슨 강을 헤험쳐 건넌적이 있었으며 그녀의 조카딸은 1964년 올림픽에서 수영종목 금메달을 땄다![5] 그녀는 35달러의 주급을 받았다.[6] 캘리포니아로 가던 도중 후일에 남편이 될 라울 월시와 그리피스 밑의 스태프였던 크리스티 커베인과의 도박에서 창문에 비친 패를 훔쳐보는 부정행위를 당해 전재산이었던 10달러를 전부 잃을 뻔했으나 이를 본 크리스티의 장모덕에 10달러를 지킨다.[7] 호흡이라 하긴...뭐하고 단지 몇 장면만 출연했을 뿐이라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 자서전에도 이 영화에 대해 서술이 거의 없다. 이는 그 당시의 영화가 그때마다 필요한 사람을 충당해가며 촬영하는 방식이었기에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릴리안 기쉬도 마찬가지였다.[8] 폭스 영화사는 1930년에 파산하고 20세기 영화사가 인수하여 20세기 폭스 가 된다[9] 자서전에선 이 영화를 비참한 최후라고 말하고 있다.[10] 쿠퍼는 1891년생이지만 묘비에는 1892년생으로 나온다. 실수인지 어떤 사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11] 다만 1968년에 촬영된 사진이 자서전에 남아있긴 하다.[12] 얼굴에 까맣게 칠을 하고 나온다[13] 영문 위키백과 출처[14] 쿠퍼의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