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성 文希聖 | |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576년 |
사망 | 1643년 (향년 67세) |
본관 | 남평 문씨 |
자 | 경수(敬修) |
호 | 우봉(愚峯) |
가족 관계 | 부 - 문관도(文貫道) |
1. 개요
조선의 무관.2. 생애
참판 문관도의 아들로 태어났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에 참전했다. 이후 서생포, 고령첨사, 수원부사를 지냈다. 하지만 수원부사로 재직 중 행정 능력에서 무능하다는 비판을 듣고 파직되었다. 1614년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압송되었으나 혐의를 풀었다. 1618년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변사의 추천으로 정주목사에 임명되었다.1619년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와 함께 분령편비방어사가 되어 좌영장 김응하, 우영장 이일원, 연영장 이찬에 이어 중군장이 되었다. 심하로 진격해 동로군의 유정과 합류했으나 추위로 인해 행군이 원활히 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늦었으며 동로군의 명군 역시 장비, 병력부족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초전인 심하 전투 당시 후금의 기마대를 퇴각시켰으나 사르후 전투 당시 산에서 진을 쳐 조총, 화포로 엄호할 예정이였으나 유정군이 전멸하고 이에 좌, 우영이 벌판에서 급하게 진을 펼쳤지만 후금의 기병대에게 전멸당했다.
이에 강홍립, 김경서와 함께 자폭하려 했으나 후금의 항복요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포로로 잡혔으나 몇 년 뒤 일부 포로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향했다.
1625년 광주목사를 지냈고 정묘호란 당시 삼전도를 방어했다. 전후 전주영장, 경상우수사, 부산첨사, 경상좌수사, 남한산성별장을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평안도 방어사가 되었으나 조방장으로 변경되었다. 1640년 남한산성 복구에 공을 세워 가의대부에 올랐다.
하지만 공과 능력에 비해 후금과의 항복경력을 서인들이 들먹이며 수사이상의 관직으로 올라가지는 못했다. 1643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