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분야마 칸우(文山漢雨) |
출생 | 1921년 1월 22일 |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2정목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 |
사망 | 2000년 5월 30일 |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경남2차아파트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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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문한우는 1921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2정목(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였고, 상경한 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명치정2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서 거주했다.그는 1943년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중 학우들과 함께 항일 성향의 토론회를 개최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그 해 4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했으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1944년 1월 20일에 일본군 대구 24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대구 24부대에 모집된 600명의 학병 중 대부분은 입대한 지 10여 일만에 북중국으로 떠났고, 3대대 3중대 소속 학병 27명만 남았다. 이때 27명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김이현(金而鉉) 등과 함께 집단항쟁을 계획했다.
이들은 먼저 탄약고 폭파 및 무기 탈취, 독극물로 일본군을 몰살한 후 집단 탈출하여 국외로 나가 독립군에 가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독극물로 일본군을 몰살한다거나 무기를 탈취하는 것이 실행하기 어렵자, 이들은 일단 집단 탈출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944년 8월 8일 그와 동지 6명이 부대 내 하수구를 통해 탈출에 성공한 뒤 팔공산에 입산했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을 감지한 일본군 및 경찰이 추격하자, 그는 권혁조와 한 조를 이루어 안동에 잠입한 뒤 서울로 가기 위해 역으로 나갔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은 그는 1944년 12월 조선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오쿠라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이후 조국으로 귀환하여 조용히 지내다 2000년 5월 30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경남2차아파트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한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