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문준경 文俊卿 | Moon Jun-kyeong | |
출생 | 1891년 2월 2일 |
전라도 지도군 암태면 수곡리 (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 |
사망 | 1950년 10월 5일 (향년 59세) |
전라남도 무안군 증도면 증동리교회 근처 백사장 (현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 | |
부모 | 아버지 문재경 |
배우자 | 정근택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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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도사 및 순교자.2. 생애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기 실력이 남보다 뛰어났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지 못하였다.문준경은 17세가 되는 1908년 3월 18일 정근택과 결혼을 해서 살고있었다. 그런 문준경에게 시아버지는 한글을 가르쳐주었고 1928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오빠가 있는 목포로 가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중 한 전도사를 만나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함께 지내며 울음을 쏟았다. 이때부터 목포 북교동교회에 발을 내딛었다.
1931년 상경하여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고 25회로 졸업할 때까지 6년을 도서지방 순회전도사가 되어 1933년 임자진리교회를 시작으로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방축리교회, 우전리교회, 사옥교회 등을 개척했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 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336장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 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섬에 목회하던 양도천전도사 백정희전도사를 다른 섬으로 피난을 시키려 했는데 배를 타려는 순간 공산 폭도들[1]이 몰려와 두 전도사를 두들겨 패어 파죽음을 시켜 놓고 죄질이 나쁘다고 생각한 문준경, 양도천, 이봉서 세 전도사는 목포 분주소로 옮겼다. 그들 일행이 떠나는 날 밤 중동리 무수한 양민이 빨치산들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1950년 9월 28일 배가 목포에 도착하니 인공기 대신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본 공산주의자들은 도망갔다.[2] 문전도사는 은신하고 있는 이성봉목사를 찾아갔다. 이목사가 난리 후에 중동리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만류하였으나 문전도사는 “저 때문에 무고한 성도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라며 “더구나 백전도사가 대신 붙잡혀 옥고를 치를 텐데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중동리로 돌아갔다.
1950년 10월 5일 제 발로 내무서를 찾아온 문준경은 새끼줄에 묶인 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끌려온 후 죽창으로 찔리고 발길로 차이며 총대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맞았다. 그 와중에도 문전도사는 자신을 죽이더라도 백정희전도사와 성도들은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였다.[3] 공산군은 '너는 반동의 씨암탉 같은 존재이기에 처형한다'며 문전도사를 창으로 잔인하게 온몸을 찔렀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자 목에도 총구를 대고 총살하여 당시 59세로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