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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41:30

문우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문남룡(文南龍)
자 / 호 제민(濟民) / 송음(松陰)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893년 6월 6일[2]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마령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3]
사망 1953년[4] 2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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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우석은 1893년 6월 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마령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에서 아버지 문치진(文致鎭)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만추(韓晩樞)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 주동자 유연성,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한 경찰 2명을 쫓아버렸고, 이후 편항 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 책상, 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했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 칼, 탄환, 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경찰이 신덕리 방향으로 도망가자,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했다. 이후엔 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을 습격하여 파괴했고 경찰의 가족들을 내쫓았다. 또한 오후 5시엔 면사무소를 습격해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했으며, 자정부터는 파괴해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귀가했다. 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건조물 손괴, 가택 침입, 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엔 안동시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3년 2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우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순질공파-참판공-승지공파 31세 석(錫) 항렬.[2]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1894년 9월 17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문치무·문도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1951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