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무함마드가 이슬람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이유로 역사상 무함마드 1세라 불린 인물은 많은 편이다.2. 아글라브 왕조의 5대 아미르
아불 압바스 무함마드 이븐 알 아글라브생몰: 788 ~ 856
재위: 841 ~ 856
초대 아미르 이브라힘 1세 이후 그 세 아들이 계승하다가, 손자 세대 중 처음으로 아미르가 되었다. 치세 초반에 시칠리아의 아글라브 군은 나폴리의 도움으로 메시나를 점령하였다. 이후 그들은 부테라 전투에서 동로마 원군을 대파하며 시칠리아 정복의 주도권을 잡았는데 사령관 알 압바스가 점차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쟁하듯 아미르 무함마드 역시 이탈리아 해안에 대한 습격에 나섰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846년 로마 약탈이었다. 대군과 함께 오스티야에 상륙한 그는 바티칸 수비대를 격파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약탈하였다. 다만 아우렐리우스 성벽의 로마시 자체는 공격하지 않았고, 성벽 밖 로마 외곽의 건물들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스폴레토의 롬바르드 군이 반격에 나서자 후퇴하였고, 그들의 공격과 항해 도중 폭풍으로 약탈물 일부를 잃었다. 그럼에도 기독교권에 준 충격은 지대하였고, 교황 레오 4세는 외성을 축조하였다.
가톨릭의 심장부인 로마를 습격한 무슬림 군주의 이름이 '무함마드'였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다만 로마 원정을 떠난 사이에 동생 아흐마드가 찬탈하고 압바스 칼리파 알 와시크처럼 순니 말리키 학파를 탄압하고 무타질라 학파를 후원하였다. 847년 그를 추방하고 복위한 무함마드는 수니파를 재정립하였고 감금되었던 법학자 사흐눈을 카디로 봉하였다. 한편 그는 기존의 동맹이던 나폴리 역시 약탈한 적이 있었다. 이에 나폴리는 849년, 재차 로마를 노린 아글라브 함대가 오스티아에 상륙했을 때에 교황군을 도와 그들의 격퇴를 도왔다. 이후 무함마드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위해 그곳으로 향하였는데 군부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알 압바스를 건드릴 수는 없었고, 856년 팔레르모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호전적이면서도 농업과 무역을 장려하였고, 공공 건축에도 힘써 수스와 스팍스 등지에 대사원이 건립되었다. 사후 아들 아부 이브라힘 아흐마드가 계승하였다.
3. 후우마이야 왕조의 5대 아미르
자세한 내용은 무함마드 1세(후우마이야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톨레도, 바누 카시, 이븐 마르완, 우마르 이븐 하프순 등의 반란에 시달렸다. 앞의 2개는 진압했지만 뒤의 2개는 진압하지 못하여 후에 약 반세기 가량 후우마이야 조를 괴롭히게 된다.
4. 호라즘 왕조의 초대 샤
페르시아어: قطب الدين محمد생몰: ? ~ 1127
재위: 1097 ~ 1127
셀주크 제국의 호라즘 총독 아누쉬테킨 가르차이의 아들로, 1097년 셀주크 술탄 바르키야루크에 의해 호라즘 샤로 봉해졌다. 본래 아누쉬테긴 사후 에킨치가 새로운 호라즘 총독이 되었으나 아미르 코둔과 아루크타쉬의 반란으로 에킨치가 살해된 후 호라즘은 독립을 시도하였는데, 셀주크 제국 군사령관인 하바쉬 이븐 알툰타크가 반란을 진압하고 아누쉬테긴의 아들이 부친의 작위를 계승하도록 한 덕분에 호라즘 샤가 된 것이다. 무함마드는 에킨치의 아들 토그릴테킨의 도전을 물리치고 호라즘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셀주크 제국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가 사망한 후 아흐마드 산자르에 충성하였고, 아흐마드 산자르가 대립 술탄 마흐무드 2세에 대한 원정에 나설 때에 종군하였다. 그 외에도 같은 제후국인 카라한 칸국의 안정을 돕기도 하였다. 1127년 사망하고 아들 아트시즈가 계승하였다.
5. 셀주크 제국의 7대 술탄
자세한 내용은 무함마드 타파르 문서 참고하십시오.6. 아사신의 3대 수장
알라무트 아사신의 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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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uhammad
생몰: ? ~ 1162
재위: 1138 ~ 1162
페르시아 아사신의 제3대 수장. 부주르구미드의 아들로 부주르구미드가 죽기 3일 전에 후계자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아사신파는 부자 세습 체계가 되었다.1138년에 수장이 되면서 파다이들을 보내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라시드를 살해했으며, 이에 대해 이스파한에서 이스마일리야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다. 1142년에는 피다이를 보내 바반드 왕조의 왕인 샤 가지 루스탐의 아들을 암살했으며, 1143년에도 피다이를 보내 셀주크의 술탄 다우드를 암살하자 라이의 셀주크 관리 아바스가 학살을 명했다.
무함마드는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밀사를 보내 박해자들로부터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아들인 하산이 추종 세력을 모으면서 숨은 이맘으로 율법 위에 존재했으므로 그의 이단적 행위들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하산은 자신의 아들이자 단지 다이에 불과해 이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산의 지지자 250명을 죽인 다음에 또다른 250명의 등에 시체를 묶은 뒤에 알라무트로 추방했다. 다만 죽기 직전에 아들 하산을 후계자로 임명했다.(하산 2세)
7. 나스르 왕조의 초대 술탄
자세한 내용은 무함마드 1세(그라나다) 문서 참고하십시오.8. 하프스 왕조의 2대 술탄[1]
생몰: 1228 ~ 1277재위: 1249 ~ 1277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로, 1249년 부왕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가 사망하자 계승하였다. 그는 1253년, 바그다드의 칼리파가 건재한데도 칼리파를 칭하였다. 이로써 칼리파 조는 무와히드 왕조, 압바스 왕조를 포함한 3개가 되었다. 당시에는 마그레브와 안달루스의 일부만이 이를 인정하였으나 1258년 바그다드의 알 무스타심이 살해되자 메카의 샤리프가 그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이에 무함마드는 정식으로 라카브 '알 무스탄시르'를 정하였다. 다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1261년 압바스 가문의 방계를 찾아내 칼리파로 옹립하였는데, 그 역시 알 무스탄시르를 택하여(알 무스탄시르 2세) 동명의 칼리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비록 그해 말엽 후자가 바그다드 수복에 나섰다가 전사하며 오래 가진 못했다.
한편 1260년대 시칠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앙주 가문과 호엔슈타우펜 왕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자의 인사들이 튀니스로 망명하였다. 이에 새로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한 샤를 1세는 하프스 조를 꺼림칙하게 여겼고, 알 무스탄시르에게 그가 기존 호엔슈타우펜 왕들에게 내던 조공을 요구했으나 답이 없자 더욱 분노하였다. 그러던 1270년, 튀니스의 제노바 상인들이 위조 금화를 정상 금화에 섞어 지불했다가 들통나 재산을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제노바는 동맹인 프랑스와 샤를에게 하소연하였다. 위의 이유들과 무역 대상인 이집트와 전쟁을 하기 싫었던 샤를의 사심이 작용하여 8차 십자군의 튀니스 행이 추진되었다. 신실했던 루이 9세는 알 무스탄시르가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는 소문에 이를 결정하였다.
1270년 7월, 루이의 십자군이 옛 카르타고에 상륙하였고 기습을 통해 성채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다음달 역병이 돌아 루이가 병사하며 십자군은 추진력을 잃었다. 다만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한 알 무스탄시르는 샤를에 협상을 요청해 조공 재개, 원정비 1/3 부담, 튀니스의 시칠리아 상인 구역 설치, 무관세 무역, 기독교 예배 및 선교의 자유, 기독교도 포로 석방 및 망명자들 추방의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다. 그해 11월, 십자군이 시칠리아로 철수하였다. 십자군과 싸우기 위해 튀니스 파병을 준비하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소식을 듣고 철회하였다. 이후로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알 무스탄시르는 1277년 사망하였다. 아들 야흐야가 계승하였고, 그 역시 칼리파 알 와시크를 칭하였다. 여담으로 사냥에 관심이 많던 그는 왕자 시절인 1247년 '사냥에 관하여'란 책을 집필했는데 당시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로 여겨진다.
9. 차가타이 칸국의 22대 칸
페르시아어: محمد ابن پلاد생몰: ? ~ 1343
재위: 1342 ~ 1343
본명은 무함마드 이븐 팔루드로,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에 차가타이 울루스는 내전과 분열이 한창이었다. 무함마드 칸은 이를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2촌 친척인 카잔 칸이 다음 칸이 되었다.
10. 오스만 제국의 3대 술탄
자세한 내용은 메흐메트 1세 문서 참고하십시오.11. 크림 칸국의 5대 칸
자세한 내용은 메흐메드 1세 기라이 문서 참고하십시오.12. 알라위 왕조의 2대 군주
아랍어 محمد بن علي الشريف생몰: ? ~ 1664
재위: 1636 ~ 1664
알라위 왕조의 2대 군주. 타필랄트 (시질마사) 아미르 알리 앗-샤리프의 장남으로서, 1636년 부왕이 수스 지방의 아부 하산 알리 앗 시믈알리와 맞서다가 사로잡히자 가무늬 수장이 되었다. 1641년 물라이 무함마드는 앗-시믈알리의 병력을 축출, 타필랄트 지역을 석권한 후 술탄을 칭하였다. 하지만 1648년 서쪽의 딜라이야 군이 침공하여 시질마사 남쪽과 서쪽의 영토를 빼앗았다. 무함마드는 모로코 주요부를 장악한 달라이야와 맞서는 대신 반대쪽인 동북쪽, 즉 오스만령 알제리 방면으로의 확장에 나섰다.
1650년 그는 알제리 중북부 아그와트와 틀렘센까지 공격하였고, 바누 마킬을 포함한 아랍 부족들을 포섭한 후 우지다를 새 근거지로 삼았다. 알라위 군의 공격에 대응한 오스만 제국은 반격에 나서 그들을 시질마사까지 몰아낸 후 협상, 다시 국경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휴전하였다. 비록 영토는 크게 늘지 않았지만 많은 아랍 부족 병력을 확보한 무함마드는 모로코의 주요 세력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 예시로 1650년 6월 페스 엘 발리의 지도부가 무함마드를 초청하여 딜라이야에 대한 반란을 시도하였다.
다만 무함마드가 실제로 페스에 당도했을 때에 달라이야 군이 다가오자 현지 지도부는 재차 그에 복속, 무함마드는 요청에 따라 귀환해야 했다. 한편 1637년 합의금과 함께 석방되어 시질마사로 돌아온 후 상왕 역할을 하던 알라 앗-샤리프가 1659년 사망하자 무함마드와의 동생 물라이 라시드는 계승권을 주장하며 다툰 끝에 시질마사를 떠나 우지다 부근 안가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1663년 라시드가 이프란 부근 아즈루에서 술탄을 칭하자 이듬해 무함마드는 안가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알라위 조는 라시드 하에 단합되었다.
13. 알제 데이국의 초대 데이
생몰: ? ~ 1682재위: 1671 ~ 1682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의 초대 데이. 알제는 1659년 예니체리 부대가 현지 파샤 (총독)을 폐위하고 그들 중에 아가를 선출하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예니체리 정권의 아가들이 내분으로 연이어 살해당하자 (12년간 4인 모두 비명횡사) 오스만 조정은 재차 파샤를 파견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671년 현지 사략선 제독인 라이스들이 그들 중에 모하메드 타리크를 튀르크계 언어로 '삼촌'을 뜻하는 데이로 선출하여 지도자로 삼았다. (무함마드 1세) 다만 조정이 파견한 파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녔기에 알제 데이국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데이 모하메드는 라이스들을 규합해 예니체리 아가들을 축출하였으나, 그로 인해 몇차례 암살 시도를 겪자 1677년 알제에서 [[트리폴리]로 도주하였다. 그가 섭정으로 둔 바바 하산은 5년 후 데이로 선출되어 집권하였다.
14. 후사인 왕조의 3대 베이
아랍어: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رشيد باي생몰: 1710 ~ 1759
재위: 1756 ~ 1759
18세기부터 1957년까지 튀니지를 지배했던 후사인 왕조의 창건자 후세인 1세의 아들로,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였다. 1735년 사촌 알리 1세가 부왕을 축출하고 베이가 되었는데, 무함마드는 수스에 봉해졌다. 그러던 1756년, 무함마드는 알제리의 도움으로 알리를 폐하고 베이가 되었다. 하지만 논공행상에서 콩스탕틴의 베이와 분쟁이 일었고, 무함마드는 요새화된 바르도로 피신하였다 동생 알리는 스팍스에서 근왕병을 모았다. 튀니스에는 튀르크 군부가 알제리 인들의 도움으로 임시 정부를 세우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알제리 군대와 바르도를 포위했는데 무함마드의 근위대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알제리 인들과 협상에 나서 연공 납부와 배상금 지불을 대가로 그들을 귀국시킬 수 있었다. 반란이 진안되자 후 동생 알리와 함께 재위했는데, 1759년 사망하자 그가 알리 2세로 계승하였다. 다만 그의 아들 마흐무드는 7대 베이로 등극, 이후 그 자손들이 세습한다.
[1] 그리고 자칭이긴 하지만 초대 칼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