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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30 23:22:42

무의종

<colcolor=#ece5b6> 당나라의 외척
武懿宗 | 무의종
작호 <colbgcolor=#fff,#191919>하내군왕(河內郡王) → 경국공(耿國公)
무(武)
이름 의종(懿宗)
생몰 641년 ~ 706년
부친 무원충(武元忠)
조부 무사일(武士逸)
본적 병주(并州) 문수현(文水縣)
국적 당(唐) → 무주(武周) → 당(唐)

1. 개요2. 생애3. 기타4.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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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주 시기의 외척. 측천무후의 조카.

2. 생애

641년 출생으로 측천황후의 숙부인 무사일(武士逸)의 손자였으며, 무원충(武元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내군왕(河內郡王)으로 책봉되고 낙주(洛州) 장사,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697년 거란손만영이 동협석곡 전투에서 왕효걸소굉휘의 군대를 격파하자, 신병도(神兵道) 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 20만 군대를 이끌고 누사덕사타충의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그러나 낙무정이 이끄는 군대가 조주에 다다랐을 때, 크게 놀라 상주(相州)로 도주하였고, 조주는 거란군에 의해 약탈되었다.[1][2]

이진충의 난이 진압된 이후 누사덕, 적인걸과 함께 하북 백성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손만영의 위협에 못 이겨 난에 참여한 하북 백성들을 전부 반역한 것으로 간주하여 죽였다.[3]

성력 원년(698년), 무유의[4]와 함께 장안에 주둔한 군대를 통솔했다.

신룡 원년(705년) 5월, 신룡정변으로 무측천이 물러난 뒤에도 중종무삼사 등의 무씨 일족들을 계속 중용했지만, 무의종은 경국공(耿國公)으로 강등되었다가 회주(懷州) 자사를 맡았다가 706년 회주에서 죽었다.

3. 기타

그는 성격이 음흉하고 흉악했다. 697년 정월, 누군가가 기주(箕州) 자사 유사례(劉思禮)와 낙주(洛州) 녹사참군 기련요(綦連耀)의 모반을 밀고하여, 측천무후는 무의종에게 이를 조사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 무의종은 과거 유사례가 조정 대신들을 널리 끌어들인다면 유사례의 사형을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평소 무의종에게 미움을 산 사람은 모두 유사례에게 고발하도록 했다. 결국 유사례는 재상 이원소, 손원형, 천관시랑 석포충, 유기 등 36명을 연루시켰는데, 모두 모진 고문을 당해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후 이원소 등이 피살되자 무의종은 역모죄로 유사례를 죽였다.

일찍이 하북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할 것을 주장했다.

4. 가계



[1] 어떤 사람이 무의종에게 낙무정이 이끄는 거란 군대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고 하였으나, 무의종은 듣지 않고 상주로 도망쳤다. 이때 버린 군수물자 및 식량이 엄청났다고 한다.[2]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전당문》에 있는 장열의 <위하내군왕무의종평기주적거란등노포>와 자치통감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3] 이후 측천무후가 협박당한 백성과 가족을 더 이상 추적하고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인 무의종도 처벌하지 않고 계속 중용했다.[4] 영주 반란 시기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서 거란군을 막기 위해 출병했고, 진자앙이 무유의의 참모로 있었는데, 무유의는 군사상으로 무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자앙이 선비라는 이유로 이를 무시했다. 진자앙의 <등유주대가> 창작 배경이 이와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