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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2:17:54

무사시(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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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무사시
Musashi
武蔵
본명 모리 아키오(森昭生)
출생 1972년 10월 17일 ([age(1972-10-17)]세)
오사카부 사카이시 미나미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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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5cm / 103kg
전적 85전 49승 30패 5무 1무효
19KO, 30판정
10KO, 20판정
링네임 무사시
주요 타이틀 K-1 2003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
K-1 2004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
기타 K-1 2003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2002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2000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1999 일본 그랑프리 우승
K-1 1995 월드 그랑프리 4위

1. 개요2. 경력3. 파이팅 스타일4. 기타

1. 개요

K-1에서 주로 활동했던 정도회관 가라테 베이스의 입식격투기 선수.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배우 및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링네임인 무사시를 그대로 예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명은 모리 아키오. 딱히 비공개는 아니지만 모리 아키오 명의로 활동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일본에서 모리 아키오라고 하면 대부분 누군지 모른다.

2015년에 출연한 실패선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파이팅 스타일은 상대가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K-1 레전드 무사시 첫고백 “안 도망치면 위험”[1]

2. 경력

K-1 데뷔전에서 패트릭 스미스[2]를 KO로 이기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일본의 에이스였던 사타케 마사아키[3]의 뒤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은 기대주였다.

사타케가 K-1을 떠난 뒤 무사시는 K-1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파이터가 되었는데 2003년과 2004년에는 K-1 WGP 결승에 2년 연속으로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결승에서 레미 본야스키의 벽을 넘지 못하고 2연속 준우승에 머물렀다. 더불어 이 당시는 무사시가 주최측의 판정 혜택을 적지 않게 받았던 시기라 일본에서조차 많은 안티팬이 생겨났다. 어느 정도였냐면 2004년 WGP 개막전에서 일본 관중들이 상대인 시릴 아비디를 응원했을 정도. 그 당시 무사시에 대한 K-1의 편파 판정을 풍자한 북두의 권 패러디 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2005년 월드 그랑프리 8강전에서 루슬란 카라에프에게 판정승을 거뒀지만 석연치 않은 판정이라 판정 논란이 있었다. 4강전에서는 글라우베 페이토자에게 플라잉 니킥을 맞아 KO패했다. 연말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는 밥 샙에게 판정승을 거뒀다.[4]

2006년 4월 라스베가스 대회에서는 세미 슐트에게 0-3 판정패, 7월 삿포로 대회에서는 작년에 자신에게 KO패를 안겨준 글라우베 페이토자와 다시 만났지만 이번에는 0-3 판정패를 당했다. 9월에 열린 K-1 WGP 2006 개막전에서는 할리드 아랍에게 1-2 판정패하며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고, 12월 2일에 열린 K-1 WGP 파이널에서는 피터 아츠와의 슈퍼파이트에서 1라운드 2분 53초 만에 펀치 연타에 KO패했다. 연말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는 한국의 투포환 선수 출신 랜디 김에게 3라운드 KO승을 거두며 연패 사슬을 끊었다.

2007년 K-1 월드 그랑프리 홍콩 토너먼트 8강에서 박용수를 만나 초강력 로블로 세 방을 얻어맞았지만 근성으로 버텨내고 펀치 KO로 승리했다. 무사시는 경기 종료 후 쓰러져 기절한 박용수를 향해 욕설을 하며 극도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침착하고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무사시였기에 이 사람 정말 화가 단단히 났구나 싶을 정도. 로블로 세 방 뿐만 아니라 박용수는 2회전 시작할 때 무사시의 글러브 터치를 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로우킥을 날리는 등 비매너를 보여줬기에 한국팬들 마저 박용수 실드를 치지 못하고 무사시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길 정도.[5] 로블로를 제외하고는 경기 내용은 간단히 끝났는데 무사시의 펀치에 의해 박용수가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평소 판정머신이라고 비웃음 당하던 무사시였으나 나름 화끈하게 경기를 끝낸셈. 그러나 준결승에 진출하여 왕캉에게 또 다시 로블로를 얻어맞고 만다. 이번엔 니킥으로 얻어 맞았다.(경기 자체는 경기 재개를 거부한 왕캉의 링 이탈로 DQ승.) 결국 어찌어찌해서 결승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로블로 세 방이 누적된 탓에 결승 진출을 포기. 병원에서 진단해보니 고환내출혈이 있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고자가 될 뻔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무자지.

2008년 4월 요코하마 대회에서는 무사시의 뒤를 이을 차세대 일본 에이스로 기대받던 사와야시키 준이치에게 3번의 다운을 뺏으면서 2라운드 KO승을 거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후쿠오카 대회에서는 후지모토 교타로에게 0-2 판정패를 당했고, 9월 K-1 월드그랑프리 2008 서울대회 파이널 16에서는 에베르톤 테세이라에게 0-3 판정패를 당했다.

2008년 12월 31일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게가드 무사시와 K-1룰로 맞붙었는데 게가드의 펀치 러시에 KO패 당했다.[6]

그리고 2009년 9월 26일 K-1 월드 그랑프리 16강전 제롬 르 밴너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경기에서는 기존의 치고 빠지면서 클린치질해대는 무사시류가 아닌 공격적인 스타일로 경기에 임했지만 만장일치 판정패했다. 참고로 당시 은퇴전이 한국 서울에서 벌어졌는데, 일본인인데다 재미없는 시합으로 유명한 무사시임에도 경기 후 관객들이 상당한 환호를 보여주었다. 경기가 끝난 뒤 밴너와 마주 절하는 모습이 나름대로 감동.[7]

3. 파이팅 스타일

무사시는 클린치나 킥 등 기술적인 부분은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파워다. 단, 이전에 비하면 정신적인 면은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피터 아츠가 2003년 K-1 WGP에서 무사시에게 패배한 후

무사시는 풀컨택트 가라테 스타일의 정공법식 인파이터로 전성기 기준 아시아권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지역 GP처럼 같은 아시아권 선수들과 싸우는 경우에는 KO로 이기거나, 거의 갖고 노는 일종의 양민학살 수준의 기량 차이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데뷔 후 2~3년 동안은 굉장히 공격적인 헤드헌터 스타일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스피디하면서 화끈한 시합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제는 체급 자체가 낮았기 때문에 기술과 체력 그리고 정신력은 있지만 신장과 파워에서 중량급의 서양 선수들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그로 인해 K-1 WGP에서 외국인 선수들만 만나면 하늘과 땅 차이 수준의 힘 차이를 보여주었고, 특히 2000년 WGP에서의 제롬 르 밴너와의 시합에서 거의 인간 샌드백 수준으로 박살이 났으며, 이후 체중을 증량하면서 스타일을 확 바꾸게 된다. 스타일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체급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95년 패트릭 스미스와 맞붙을때 감량을 하지 않았던 무사시의 체중이 83kg였다.[8] 즉, K-1에 뛰기전 90년대 초중반 무사시의 적정 체급은 엄밀히 말해 80kg가 아니라 70kg대의 체급이었다. 문제는 무사시가 K-1입문했던 90년대 중후반에는 무사시가 뛸만했던 K-2는 인기저조로 단숨에 폐지됐고, K-2에서 뛰던 후스트마저 K-1에서 뛰기 위해 증량을 했던 시기라는 것. 물론 무사시도 후스트 정도의 골격과 맷집은 되지만 당시의 K-1은 경량급 대회가 별도로 없이, 80kg 이상에 상한이 없는 무제한 체급 대회였다. 애초에 평소 체중이 80kg가 조금 넘는 무사시와 110kg이 넘는 제롬 르 밴너는 체급부터 달랐지만 정도회관의 권유를 거부할 수 없었던 무사시는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억지증량을 해서 103kg로 벌크업하고 K-1 WGP에 참가하게 된다.

하지만 본래 체구가 호리호리한데다 체지방을 불려서 억지로 증량한 것이기에, 본래부터 중량급이던 선수들과 힘대결을 할 수는 없었고 실제로 호되게 이후 그는 모험을 하지 않고 그나마 있는 맷집으로 들어가 클린치를 한 다음 판정승으로 안전하게 이기는 스타일로 안착한다. 게다가 이게 실제로 잘 통했다.[9] 분명 체격이 압도적으로 큰 탑클래스 서양인 선수들조차 무사시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판정까지 끌려가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보는 사람들은 답답할 지언정 플레이하는 선수들 사이에서는 기량면에서 무사시를 높게 쳐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4. 기타



[1] 기사에 "안 도망치면 위험"이라고 번역된 문장의 원문은 이카리 신지의 "도망치면 안 돼(逃げちゃダメだ)"를 패러디한 "도망안치면 안돼(逃げなきゃダメだ)"였으며, 방송에서도 중얼중얼 거리는 등 대놓고 패러디했다.[2] 앤디 훅을 19초 만에 박살낸 적이 있는 선수이다.[3] 정도회관 출신으로 K-1 초기 일본을 대표했던 인물. 애초에 K-1 자체가 사타케 마사아키가 세계에 먹힌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그랑프리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월드 그랑프리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그래도 K-1 WGP 1994에서 준우승을 했었는데 당시 우승자는 피터 아츠였다.[4] 이 경기에서 밥 샙의 후두부 가격에 무사시가 실신하기도 했지만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재개해서 판정승을 거뒀다.[5] 팬들의 반응은 난생 처음 한일전에서 일본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건 남자로서 무사시에게 미안하다 등 박용수의 비매너에 대한 극딜과 무사시에 대한 동정 여론이 대부분이게 되었다. 박용수의 송곳같이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로블로킥은 거세킥으로 불리게 된다.[6] 이 대회에서 종합격투기 선수와 K-1 선수가 K-1 룰로 맞붙은 시합이 3경기 있었는데 게가드 무사시 vs 무사시, 카와지리 타츠야 vs 타게다 코조, 알리스타 오브레임 vs 바다 하리 경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3경기 전부 종합격투기 선수인 게가드 무사시, 카와지리 타츠야, 알리스타 오브레임의 1라운드 KO승으로 끝났다.[7]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이 무렵에 세미 슐트가 K-1 무대를 일방적으로 접수해 버리면서 하드웨어의 영향력이 매우 심하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사시에 대한 여론도 비겁하게 판정빨로 경기한다.판정이야 심판 잘못이고, 무사시가 그렇게 경기한 것은 하드웨어의 영향이 강한 K-1 무차별급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로 바뀌고 있었다.[8] UFC에서 -77kg급을 뛰던 Gsp의 평소체중이 이 정도였는데, GSP는 감량 폭이 적은 편이다. 평체가 83이면 70kg 초반대까지도 충분히 감량할 수 있다.[9] 실제로 90년대에 무사시가 깨강정이 되는 장면들을 보면, 실력이 있어도 도저히 힘 차이가 극복이 안 될 수준이었다.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갑자기 100kg로 증량해서 마이크 타이슨과 붙는다고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