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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13 09:10:58

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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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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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1B4D><colcolor=#522142,#522142> 월(越)나라 44대 국군
제11대 왕
월왕 무강
越王 無彊
미(羋)
무강(無彊)
아버지 월왕 무여(越王 無余)[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3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33년 (10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제44대 군주이자, 제11대 왕. 일명 무강(無強). 월왕 무여의 아들. 월왕 무전의 동생.

2. 생애

월왕 무강 대에 그는 제(齊)나라초(楚)나라와 다투었다. 이에 제위왕(齊威王)이 월왕 무강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2]
"월나라가 초나라를 치지 않으면 크게는 왕이 될 수 없고, 작게는 패자를 칭할 수 없소. 월나라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이유는 삼진이 돕지 않았기 때문이오. 한(韓)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다가 병사들이 대파되고 장수가 죽어 진(陳)과 상채(上蔡)가 위험해지오. 그래서 월나라와 화친을 하려 한 것이오. 그것은 장수를 보호하려고 그런 것이지 월나라를 위한게 아니오. 그런데 어찌하여 위나라와 한나라에게 의지하시오?"

월왕 무강이 대답했다.
"과인이 바라는 것은 한나라와 위(魏)나라에 바라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그저 허장성세만 해주기를 바랄 뿐이겠소? 위나라가 대량(大梁)에 병력을 모으고 제나라가 군대를 남양(南陽)과 거(莒) 땅에서 군사를 훈련시켜 상(常)과 담(郯)의 경계에 주둔시키길 바랄 뿐이오. 이러면 초나라가 방성(方城)을 넘어 남하하지 못하고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사이로 동진하지 못하며 상(商)과 오(於)[3] 석(析)과 역(酈), 종호(宗胡) 땅과 하로(夏路) 서부로 진(秦)나라를 방비하기에 역부족이고 강남과 사수에서 월나라를 공격하기에 역부족이오. 이렇게 되면 제나라, 진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초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며, 농사를 짓지 않고 수확할 수 있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황하(黃河)와 화산(華山) 사이에서 병력을 소모해 제나라와 진나라의 압박을 받게 되오. 이들이 이렇게 실책을 범하는데 이걸로 어찌 왕업을 이룰 수 있겠소?"

제나라 사신이 무강에게 말했다.
"월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실로 천만다행입니다. 이것을 어찌 지혜롭다 하겠습니까? 타국 사정은 훤하면서 근처의 사정은 모르십니다. 초나라는 이미 병력을 분산시켰는데, 한나라와 위나에게 뭘 더해달라는지 모르겠습니다."

월왕 무강이 대책을 물으니 제나라 사신이 제나라 대신 초나라를 치라고 했다. 이에 월왕 무강은 그 말을 그대로 따라 초나라를 쳤다. 그러나 초위왕(楚威王)이 월나라를 쳐서 월군을 무찌르고 월왕 무강을 잡아 죽여 오나라 옛 땅의 강변 유역을 모조리 차지했다. 그리고 제나라는 서주를 차지했다. 그렇게 하여 왕족 중 세력이 큰 이는 월왕, 작은 이는 군이 되었고 이들은 초나라에게 대항할 힘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초나라에게 복속했다. 그리고 기원전 306년, 월나라는 완전히 초나라에게 망해버렸다.


[1] 지후(之侯) 또는 망안(莽安)이라 하기도 한다[2] 사기 기준으로 제 위왕과 무강의 재위 기간이 겹치지 않는데 여기서 겹치니 사기 한정으로 모순인 듯 하지만 실상은 겹친다. 자세한 그 이유는 제 위왕이 죽서기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기원전 320년 대까지 재위하다 죽었기 때문이다.[3] 이름과 지명으로 쓰일 때는 애도절(哀都切)로 음이 오(烏)라고 하여, 오라고 발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