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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6:50:56

모척

毛尺
? ~ 660년

1. 개요2. 행적3. 대야성 전투4. 죽음

1. 개요

삼국시대 신라의 인물.

642년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데 가담한 뒤 18년쯤 백제에서 살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나ㆍ당 연합군에게 처형되었다.

2. 행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왕에 적힌 기록에 의하면 본래 신라 출신이었다가 백제로 도망친 인물[1]로, 642년(선덕여왕 11) 8월 백제 의자왕 휘하의 장수 윤충이 대군을 이끌고 신라 서부전선의 요새인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자 당시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겨 분노하던 검일과 공모하여 백제군과 내통을 하고 백제 병사를 성중에 있는 군량미 창고로 인도하여 불을 질렀다.

3. 대야성 전투

김품석은 그의 막료인 아찬 서천으로 하여금 윤충과 협상하게 하여 목숨을 보전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성문을 열어 일부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백제의 복병은 이들을 살해했다. 완전히 절망한 품석은 처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대야성(합천)은 사지 용석과 죽죽이 대야성(합천)성문을 굳게 닫고 끝까지 맞서 싸워 지켰으나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4. 죽음

검일과 같이 백제에 귀부한 그는 백제ㆍ고구려와 함께 신라를 자주 공격하였다. 둘은 한 마디로 신라의 매국노로 찍힌 거다. 하지만 660년(태종 무열왕 7년) 나당연합군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승전 기념 잔치에 검일과 함께 붙들려 와 끔살당했다. 그나마 같이 죽은 검일은 사지가 찢겨 죽었지만 모척은 그냥 목이 베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모척의 가족은 죽지 않고 흥륜사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때로부터 600년 이상이 지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살고 있던 고려 후기 당시까지 모척의 후손들의 대가 경주 흥륜사에서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다.[2]


[1] 뒤에 언급되는 검일과 더불어 김품석 휘하의 막료로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2] 아무래도 일반 노예보다 편한 사찰의 노예였으니 대가 이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