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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제5대 샤한샤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 مظفرالدین شاه قاجار | |
<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 مظفرالدین شاه قاجار |
출생 | 1853년 3월 23일 |
카자르 왕조 타브리즈 | |
사망 | 1907년 1월 3일 (향년 53세) |
카자르 왕조 테헤란 | |
재위 기간 | 카자르 왕조 샤한샤 |
1896년 5월 1일 ~ 1907년 1월 3일 (10년) | |
전임자 | 나세르 알딘 샤 카자르 |
후임자 |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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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자르 왕조의 제5대 샤한샤.2. 통치
당시 페르시아는 나세르 알딘 샤 카자르의 실책으로 한창 망하가던 시기였는데, 그 와중에 새로 즉위한 모자파르 앗딘 샤는 나세르 알딘 샤를 능가하는 암군이었다. 그는 35년 간이나 왕세자 지위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아 국가의 주요 중대사에 제대로 참여하거나 배울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름 근대화를 시도해보기라도 한 나세르 알딘 샤와도 비교도 힘들 정도로 무능한 인간이었다. 그가 즉위할 당시 이미 페르시아 궁정은 파산할랑 말랑한 아슬아슬한 상태였는데, 모자파르 앗딘 샤는 이를 갚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더더욱 부채를 늘렸다. 그는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더욱 많은 빚을 내서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몰두했고, 나중에는 빚을 내서 기존의 빚과 이자를 갚는 데에도 벅찬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막대한 부채의 이자를 갚고 조금 여윳돈이 생긴다고 해도 이를 경제 개발에 투자할 생각도 않고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으로만 모든 재화를 탕진했다.1901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석유가 터졌다. 잘만 하면 대박을 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모자파르 앗딘 샤는 그 기회를 한 방에 날려먹었다. 이란의 북부 5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하여 60년 간의 석유 채굴 독점권을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에게 넘긴 초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었다. 초기에는 윌리엄 녹스 다시가 유전 탐사에 실패하며 개인 재산을 소진했지만, 마침내 1908년에 이란 남부의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유전을 발견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1909년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를 세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을 그대로 챙겨갔다. 카자르 왕조는 그때서야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지만 이미 독점권을 헌납해버렸던 탓에 회사의 연간 수입의 16%만을 가져갈 수 있었다. 자원의 중요성을 몰랐던 무능한 정부의 한계였다. 1914년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의 지분 51%가 영국 정부에게 매각되며 카자르 왕조는 영국 해군의 주요 연료 공급처 신세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샤가 허구한 날 개인의 향락을 일삼으며 사고를 치고 다니자 국민들의 지지는 땅에 떨어졌다. 샤의 유럽 여행 자금을 조달하겠답시고 러시아로부터 두 건의 거대한 차관을 지원받질 않나, 서양이 찔러준 약간의 뇌물을 받고 도로 건설 독점권, 수입품에 대한 관세 징수권 등을 있는대로 팔아넘기자 왕가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외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은 무슬림 성직자, 귀족들, 평민들 등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퍼져나갔고, 샤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결국 1906년의 입헌 혁명을 불러오게 된다.
1906년 처음 개회한 페르시아의 첫 의회 '마즐리스(Majlis)'.
1905년 샤의 개인 여행 비용을 충당키 위해 관세를 물리자 이에 폭발한 상인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해 12월에 상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자르를 닫아걸었고, 테헤란 일대 전체에서 시위대들이 들고 일어났다. 깜짝 놀란 샤는 총리를 교체하고 자신의 권력을 일부 '정의의 집'에 이양하는 데 동의하며 한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시위대가 해산하고 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시위대는 1906년 여름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상인들이 주도하는 1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영국 대사관 안에 결집했다. 시위대는 의회 결성을 요구했고 그해 1906년 8월에 샤는 요구안을 받아들였다. 그해 가을에 165명의 의원들을 뽑는 첫 의회 선거가 치러졌으며 압도적 다수의 의원들이 테헤란, 상인 계급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롭게 구성된 의회는 1906년 10월에 처음 개회했다. 이미 늙어 지쳐버린 모자파르 앗단 샤는 1906년 12월 30일에 헌법 제정안에 서명했고, 그가 5일 후에 승하하며 이 것이 그의 거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