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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03 16:05:20

모세스 호레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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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세스 호레나치
(고대 아르메니아어: Մովսէս Խորենացի)
출생 410년경
사망 490년대
직위 아르메니아 성직자, 역사가

1. 개요2. 행적3. 아르메니아인의 역사(Պատմություն Հայո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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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세기경 아르메니아 왕국의 성직자, 역사가. '아르메니아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리는 인물이다.

2. 행적

410년경 아르메니아의 타론 또는 투루베란 지방의 호르니 마을에서 출생했다. '모세스 호레니치'는 호르니 출신의 모세스를 의미한다. 그의 전반적인 생애는 본인이 기술한 <아르메니아인의 역사>의 끝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슈니크에서 교육받다가 아르메니아어 문자를 창시한 메스로프 마슈토츠와 샤하크 파르테프의 지원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했다. 당시 두 학자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적힌 문헌을 자신들이 개발한 언어로 번역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를 비롯한 우수한 학생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의 문법, 웅변술, 신학, 철학 등을 익혀서 성경, 철학서 등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는 데 도움을 주길 희망했다.

모세스를 비롯한 유학생들은 432년에서 435년 사이에 아르메니아를 떠나 에데사를 들렀다가 예루살렘을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했다. 이후 7년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아테네에서 공부한 뒤 아르메니아로 돌아갔으나 두 사람이 죽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모세스는 이에 대해 <아르메니아의 역사>에서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거둔 성취에 기뻐할 것이라 여기고 귀환을 서둘렀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 우리는 선생들의 무덤을 마주봐야 했다. (중략) 나는 그들이 눈을 감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들의 유언을 듣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메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사산 왕조의 통치자들은 적성국인 동로마 제국에 유학갔다 온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결국 그는 바하르샤파트 인근 마을에 숨어 수십년 간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이자 예전에 그와 함께 유학 갔었던 규트(Gyut)와 재회한 그는 규트의 추천으로 바그레반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이후 사하크 바그라투니 공작으로부터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건국부터 아르메니아 왕국의 멸망까지 다룬 연대기를 집필했다. 490년대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3. 아르메니아인의 역사(Պատմություն Հայոց)

모세스의 역작 <아르메니아인의 역사(Պատմություն Հայոց)>는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역사서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 아시리아어, 히브리어 등으로 기술된 각종 역사 자료와 구전 및 민담 등을 수집했으며, 성경에서 파생된 전승도 첨가해 아르메니아 만의 독특한 연대기를 집필했다. 이 저서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는 먼저 아르메니아의 건국 신화를 소개한다. 노아의 후손인 야벳의 피를 물려받은 하이크(Hayk)는 어느 날 바빌로니아의 사악한 폭군 벨(Bel)에게 반기를 들고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후 정박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산 주변으로 피신했다. 벨이 그를 잡으러 오면서 그곳에서 벨의 군대와 하이크 및 친족들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끝에 벨이 죽었다. 그 후 하이크의 후예들은 '하이족'이라 지칭되었으며, 그들이 사는 땅은 하야사(Hayasa)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국가의 기원을 설명한 뒤 아르메니아 정치제도의 진화와 문화,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조들의 역사를 계속해서 서술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에서 영향력을 떨친 씨족을 중점적으로 서술했는데,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씨족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저서 집필을 후원한 바그라투니 씨족의 비중을 늘리고 사산 왕조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역자 노릇하는 마미코니안 씨족의 비중을 최소화했다. 또한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이끈 아르탁세스 1세, 아르메니아 최전성기를 이끈 티그라네스 2세, 사산 왕조를 물리쳐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이끌고 기독교 국교화를 진두지휘한 티리다테스 3세 등 위대한 군주들 뿐만 아니라 성 그레고리 등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에게도 특별한 초점을 맞췄다.

그의 저서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는 하이크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까지 이어지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이고, 두 번째는 알렉산드로스에서 티리다테스 3세의 통치까지 이어지는 '우리 조상들의 중기 역사'이며, 세번째 부분은 티리다테스 3세 사후부터 아르샤쿠니 왕조의 멸망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리고 네번째 부분은 사산 왕조로부터 독립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투쟁사를 다뤘다. 그 중엔 그에게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쓰도록 의뢰한 샤하크 바그라투니의 사상 왕조와의 전쟁도 있었다.

모세스의 저서는 연대순으로 모순된 점이 많으며, 일부 통치자들이 다른 통치자들과 혼동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구절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서기 1세기 후반에 티리다테스 1세가 가르니 시를 건설하면서 여동생 호스로비두크트를 위한 그리스어로 된 비문을 제작했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1945년 가르니에서 발견된 유적지에서 티리다테스의 이름을 딴 비문이 발견되었다.

모세스의 <아르메니아인의 역사>는 수도자들의 필사본으로서 명맥을 이어가다가 1695년 인쇄술이 아르메니아에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대량 인쇄되었고, 많은 아르메니아 역사가들과 지식인들에게 아르메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모세스에 대한 연구는 아르메니아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