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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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와 오이라트 사이에 있었던 관계를 정리하는 문서2. 초기 관계
초기 명나라는 오이라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몽골의 한 부족으로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이라트와 몽골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오루크테무르 칸이 오이라트와 죽도록 싸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후였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오랑캐들 사이의 단순한 분란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그러다가 영락제 때 본격적으로 관계 변화가 일어난다. 영락제는 몽골의 칸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는데 사신이 살해당하자 복수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오이라트가 몽골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오이라트의 유력자 세명 마하무드와 타이핑, 파도파라에게 각각 순녕왕(順寧王), 현의왕(賢義王), 안락왕(安樂王)의 직책을 주었다. 그리고 직접 친정을 나갔을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명나라와 오이라트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오이라트는 명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할 길이 생기고,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명나라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커졌다는 것이었다. 마하무드가 타이핑과 파도파라를 살해하고 사실상 오이라트의 유일한 유력자가 되었고, 몽골 초원 서쪽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한 것이었다. 결국 영락제는 오이라트를 한번 밟아줘야 한다고 판단. 2차 친정을 나가게 된다. 이 때 오이라트는 큰 타격을 받고 영락제에게 말을 바쳐 사죄한다. 이 때 타격이 꽤 컸었는지 한동안 몽골에게 시달려야 했다.
3. 에센 타이시 시절
이후 오이라트는 토곤의 지도로 초원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에센이 그의 아버지를 이어 오이라트의 지도자가 되었다. 초원을 장악한 그는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제외 주변 세력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허수아비 칸이었던 타이순에게 여진, 조선 등 동쪽 지역을 포섭시키라 하고, 자신은 모굴리스탄 칸국, 하미 지방 등 서쪽을 공략하기로 한다. 1442년 타이순 칸이 과거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자신한테 매를 바치고 우호를 보이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이를 거절했으나 나중에 뭔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렸다. 명나라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오이라트를 경계하기 시작한다.명나라는 명나라의 울타리와 같은 여진족과 우량카이 3위, 관서에 있는 7위에 절대 오이라트에 붙지 말라 칙서를 내린다. 하지만 1443년 에센이 하미를 장악하고 주위의 적근몽고위와 사주위를 공격하면서 관서7위는 슬슬 에센의 편에 붙기 시작한다. 이 때 명나라는 우량카이3위가 에센과 함께 하미를 공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노해 우량카이3위를 정벌한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해서여진, 건주여진, 우량카이3위, 관서7위에 절대 오이라트 편에 붙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당시 우량카이3위와 해서여진은 둘 중에 어느 편에 붙을지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1449년에 이르기 까지 에센에게 몇차례 공격을 받기도 했다.
1444년 8월 무렵에 명나라는 에센과 타이순 칸이 가족들을 숨기고 각각 서쪽과 동쪽 방향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입수하게 된다. 명나라는 이에 변방의 장수들에게 청야전술을 펼치고, 방어시설 강화, 첩보 강화를 주문했다. 하지만 1444년은 아무런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오이라트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물밑으로 하미 주변 세력들과 여진족들에게 관직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명나라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때당시까지만 해도 서로 겉으로는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전히 오이라트에게 교역의 문을 열어주고 있었고, 오이라트도 명나라에 대해 국소적 약탈을 벌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446년에 에센이 명나라를 침공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나 그 해도 전쟁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1447년 1월에 변방의 장수가 보낸 표문에서는 오이라트가 언제든지 쳐들어올 기회를 노리고 있다며 국경선을 살피는 도적들의 불빛이 꺼지는 날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변방에서는 분명 곧 있으면 큰 일 제대로 터질 것이라고 중앙에 계속해서 보고를 넣었다. 하지만 중앙에서는 방비를 강화하하라는 뻔한 말만 내렸고, 주변 이민족들에게 오이라트 편에 붙지 말라고 으름장만 놓았다.
1447년 10월에 요동에서 에센이 조선으로 침공할 수 있다는 소문이 흘러들어왔다. 당시 국왕이었던 세종대왕은 에센이 명나라와 여진족을 무시하고 곧바로 조선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터무니없지만 저번에 사신을 거절한 것을 트집잡아 쳐들어올 수 있으니 북방의 경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447년 11월에 몽골족 한 명이 명나라에 투항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북방의 달단족(韃靼) 아아탈태(阿兒脫台)가 귀순하여 말하기를, "야선(也先)의 장막 아래에서 평장(平章) 극래(克來)와 함께 거주하였으나, 음모가 드러나 해를 입을까 두려워 귀순하였습니다. 또한 야선이 남쪽을 침략하려고 모의하여 그의 주인인 탈탈불화왕(脫脫不花王)에게 강요하였으나, 왕이 이를 만류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사용하는 많은 자원이 대명(大明)에서 오는 것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느냐? 하늘의 도리는 거스를 수 없으니, 거스르면 반드시 그 재앙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야선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왕이 하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 하겠다. 큰 성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밭을 경작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이 쉴 수 없게 하며, 많은 약탈을 일으켜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또 야선은 그가 사로잡은 사람들을 밤에 풀어주어 두 명이 경사(京師)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는 호의에서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동태를 엿보려는 의도입니다."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명하여 아아탈태(阿兒脫台)를 남경(南京) 금의위(錦衣衛)의 대봉소진무(帶俸所鎮撫)로 임명하고, 관대(冠帶)와 거처를 제공하였다.
영종예황제실록 권160 정통 12년 11월 19일
상(上)께서 명하여 아아탈태(阿兒脫台)를 남경(南京) 금의위(錦衣衛)의 대봉소진무(帶俸所鎮撫)로 임명하고, 관대(冠帶)와 거처를 제공하였다.
영종예황제실록 권160 정통 12년 11월 19일
그리고 1449년 9월 마침내 제대로 일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