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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4 18:01:09

맥고



1. 개요2. 생애
2.1. 내전 이전의 행적2.2. 코케테무르를 배신하고 내전을 일으키다2.3. 최후
3. 여담

1. 개요

貊高
(? ~ 1368년 8월 14일)

원나라 말기의 관료이자 군벌로 태화현(太和縣)[1] 사람이다.

2. 생애

2.1. 내전 이전의 행적

맥고는 처음에 차칸테무르의 부장(部將)으로서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웠다. 특히 맥고는 군사(軍事)에 대해 해박하여 그에 대한 담론을 잘했을 뿐더러 용병술에도 뛰어나서 차칸테무르의 신임을 얻었다.

1362년에 차칸테무르가 죽고 그의 양아들 코케테무르가 차칸테무르의 병권을 이어받게 되자 맥고 또한 코케테무르를 주장으로 섬기게 되었으며, 코케테무르가 베이르테무르와 내전을 벌이게 되자 맥고는 베이르테무르의 부장인 장량필(張良弼)을 공격하면서 코케테무르를 지원하였다.

1364년에 황태자가 코케테무르에게 베이르테무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맥고는 죽정(竹貞)과 함께 4만 군대를 이끌고 베이르테무르의 본거지인 대동(大同)을 공격하지만 베이르테무르의 방어에 막혀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맥고 등의 공격을 물리친 베이르테무르는 나라의 경사(京師)인 대도(大都)로 진격하여 황태자를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365년에 베이르테무르가 주살(誅殺)당하자 맥고는 죽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대도로 향하였다. 8월 1일, 맥고와 죽정은 도성(都城)의 앞에 도착하였지만 성문을 열어주는 자들이 사흘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두 사람은 성벽 위로 줄을 대고 병사들에게 성벽을 올라가도록 하는 한편, 성문의 빗장을 부수고 성문을 강제로 여니 비로소 모든 병사들이 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도성으로 입성한 후 민가를 멋대로 점령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패악질을 부렸다.
이후 코케테무르가 베이르테무르를 격파한 공으로 하남왕(河南王)이 되어서 전국의 병사들을 통솔하게 되자 맥고는 코케테무르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제남(濟南)에 주둔하면서 그곳을 지켰다.

2.2. 코케테무르를 배신하고 내전을 일으키다

1367년, 코케테무르가 맥고를 섬서(陝西)의 하중(河中)으로 파견하여 자신에게 항거하는 군벌인 이사제(李思齊)를 공격하도록 하였지만, 맥고는 코케테무르가 계속해서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코케테무르가 불충한 마음을 품었음을 이유로 들어서 군사반란을 획책한다.[2] 우선 맥고는 하중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켜 섬서 지역을 공격하던 코케테무르의 선봉대를 와해시켰고, 이에 코케테무르의 선봉장을 맡던 관보(關保)[3], 호임적(虎林赤) 등이 달아나서 코케테무르의 군대가 무력화되었다.

8월 6일, 맥고는 위휘(衞輝)[4]의 수장(守將) 여인보(余仁輔), 창덕(彰德)의 수장 범국영(范國英)과 싸워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위휘, 창덕을 코케테무르에게서 탈취한다. 그 직후에 맥고는 군대를 이끌고 청화(清化)에 이르러서 회경(懷慶)[5]으로 진격하려 하였지만 회경의 수비가 굳게 갖추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창덕으로 귀환하였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창덕으로 귀환한 맥고는 조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다.
신하된 자는 마땅히 임금을 받들어서 본분을 다해야 하는데, 이는 임금에게 온 마음으로 충성을 바치고 백성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총병관(總兵官)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6]는 해를 거듭할 수록 외적이 아닌 관군(官軍)을 원수로 여기고 그들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이에 신(臣) 등은 조정에서 충성되고 의로운 인물을 배양하기를 권합니다. 본성이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는 주장이 되어서도 어찌 조정의 명령에 따라 힘쓰지 않겠습니까? 명나라에는 조서(詔書)를 보내어 그들이 항복을 구걸하도록 하고, 우리는 별도로 중신(重臣)을 선발하여 그에게 대병(大兵)을 총괄토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7][8]
조정에서 이에 호응하여 맥고에게 충의공신(忠義功臣)의 칭호를 내리는 한편, 그에게 코케테무르를 토벌하라는 명령[9]을 내린다.

10월 1일, 맥고는 코케테무르의 본거지가 있는 산서(山西)로 진격하여 맹주(孟州), 흔주(忻州), 획주(漷州)를 차례로 함락시켰고, 마침내 야속(也速)과 군대를 합쳐 진정(眞定)[10]을 공격했지만 수비가 굳건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자 창덕으로 회군하였다. 그 후 황태자가 무군원(撫軍院)[11]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가 되자 맥고는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의 재상직을 겸하게 되었으며, 무군원으로부터 하북(河北) 지역의 모든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2.3. 최후

1368년, 조정에서는 관보에게 진녕(晉寧)으로 부임하게 하는 한편 코케테무르의 본거지인 기녕(冀寧)에 관리들을 파견하였지만 코케테무르가 또다시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여 기녕으로 부임하는 조정의 관리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죽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2월 1일에 코케테무르의 왕작(王爵)을 박탈하고 독로(禿魯), 이사제(李思齊) 등의 모든 장수들에게 맥고와 힘을 합쳐서 코케테무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 코케테무르는 위기에 몰리자 택주(澤州)에서 진녕으로 달아났고, 맥고는 그 틈을 타서 택주, 노주(潞州)를 모두 탈취한 관보와 군대를 합쳤다.

이후로도 맥고와 관보는 산서 지역의 남은 성들을 마저 공격하여 번번이 무너뜨렸으며, 코케테무르는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나기를 반복하게 되니 코케테무르의 세력권은 진녕, 기녕 두 곳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는 명나라의 북벌군이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여 중원(中原)을 무너뜨리고 대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는데, 맥고는 그들을 막는 대신 코케테무르를 완전히 토벌하고자 하였고, 결국 관보와 함께 진녕을 공격하려 하였다.
가을 7월, 맥고는 진녕을 향하여 진격하였지만 물자가 부족해지자 진녕을 공격하기 앞서서 기현(祁縣)[12]을 약탈하였는데, 이를 노리고 있던 코케테무르가 밤중에 맥고의 군대를 기습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맥고는 크게 패배하여 관보와 함께 코케테무르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이로써 군벌 간의 내전이 종결되었다. 코케테무르는 조정으로 사람을 보내서 두 사람에 대한 처분을 묻자 코케테무르를 두려워한 조정은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관보와 맥고를 반란분자로 규정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조정의 글이 전해지자 코케테무르는 지체없이 맥고와 관보를 살해하니 이날이 8월 초하룻날[13]이었다.

3. 여담

차칸테무르가 인정하고 코케테무르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큼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시세를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명나라군을 과소평가하였고, 결국 명나라군이 중원에 진출하였음에도 이들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코케테무르와의 싸움에만 골몰하는 어리석은 행보를 보이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뛰어난 용병술과는 별개로 약탈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결국 이러한 허점이 원인이 되어서 코케테무르에게 패배하게 된다. 여러모로 명장의 평가를 받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인물이다.
[1] 오늘날의 안후이성(安徽省) 푸양시(阜陽市) 타이허현(太和縣)[2] 이 당시에 맥고의 부장들 중에는 이전에 베이르테무르의 부곡(部曲) 출신이었던 장수들이 많았다. 이들은 코케테무르에게 원한이 있었으므로 맥고가 분란을 일으키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하였다.[3] 후술하겠지만 관보는 이후에 조정의 회유를 받고 맥고와 협력하여 코케테무르를 공격하게 되나, 이 당시에는 코케테무르의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4]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후이셴시(輝縣市)[5] 오늘날의 허난성 친양시(沁陽市)[6] 코케테무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7] 원문을 의역한 것이다. 원문: 人臣以尊君為本,以盡忠為心,以愛民為務。今總兵官擴廓帖木兒,歲與官軍讎殺,臣等乃朝廷培養之人,素知忠義,焉能俛首聽命。乞降明詔,別選重臣,以總大兵。[8] 여담으로 이 글은 명나라에 대한 맥고의 안일한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명나라군의 북상에 대한 맥고의 무대응으로 이어졌고, 이는 나라의 방비에 치명적인 허점을 남기게 된다.[9]원사(元史)》에 기술된 내용을 이 문서에도 동일하게 서술하였지만 이 당시에는 코케테무르의 관직과 작위가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공식적인 명령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오늘의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시(石家庄市) 정딩현(正定縣)[11] 코케테무르의 병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12] 오늘의 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치현(祁縣)[13] 양력으로는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