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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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공화국 제27대 대통령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Maximiliano Hernández Martíne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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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f47af><colcolor=#ffffff> 본명 |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Maximiliano Hernández Martínez | ||
출생 | 1882년 10월 21일 | ||
엘살바도르 산마티아스 | |||
사망 | 1966년 5월 15일 | ||
온두라스 하마스트란 | |||
재임기간 | 엘살바도르 제27대 대통령(임시)[1] | ||
1931년 12월 4일 ~ 1934년 8월 28일 | |||
재임기간 | 엘살바도르 제27대 대통령 | ||
1935년 3월 1일 ~ 1944년 5월 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f47af><colcolor=#ffffff> 부모 | <colcolor=#373a3c,#ddd>아버지 라이문도 에르난데스 어머니 페트로나 마르티네스 | |
배우자 | 콘셉시온 몬테아구도 | ||
자녀 | 알베르토 카르멘 에스페란사 마리나 에두아르도 로사 글로리아 암브로시오 막시밀리아노 | ||
학력 | 과테말라 사관학교 엘살바도르 대학교 (중퇴) | ||
종교 | 신지학 | ||
정당 | 국민정당 "조국을 위하여" | }}}}}}}}} |
1. 개요
엘살바도르의 군인이자 27대 대통령(1931~1934, 1935~1944)이다. 중남미의 다른 대통령과 구별되는 그만의 독특한 도덕관과 종교, 기행으로 유명한 대통령이다. 엘살바도르 정치사적으로는 1979년까지 이어지게 될 군인 대통령 시대를 열어젖힌 중요한 인물이다. 그 이전에도 군부는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지만 어디까지나 기존 정치문화에 포섭된 기관으로서, 그 자율성은 기존 민간 정치시스템이 규정했다. 국방부 장관은 민간 인사가 맡았고, 예산은 국회가 심의하고 공포했다. 그러나 마르티네스 집권 후 마르티네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기에게 익숙한 군사문화를 엘살바도르 전체에 이식하면서 본격적인 엘살바도르 사회의 군사화가 시작되었다.2. 생애
1882년 10월 21일 산마티아스(San Matías)에서 태어났다. 과테말라 사관학교(Escuela Politécnica)에 유학 후 귀국하여 엘살바도르 대학교 법학및사회학부에 다녔으나 군인으로서의 커리어에 집중하기 위해 대학교를 그만두었다. 1919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31년 대선에 국민공화당(Partido Nacional Republicano) 후보로 출마했으나 중도좌파 성향의 노동당(Partido Laborista) 후보 아르투로 아라우호를 지지하며 사퇴했다.이후 아라우호는 마르티네스를 러닝메이트로 삼아 대선을 경주했고 비록 과반 득표하지는 못했으나 의회 대부분을 차지한 동료 의원들의 지지에 힘입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라우호는 대공황으로 발생한 극심한 정치경제적 위기를 해소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그의 정부는 1931년 12월 2일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다. 쿠데타 세력은 시민 총재정부(Directorio Cívico)를 구성하고 4일 마르티네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미국과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그의 정부를 1934년 1월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2.1. 대통령 재임기(1차)
1932년 1월 말 과테말라 국경지대 근처의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엘살바도르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El Salvador)이 주도한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마르티네스는 군대와 헌병대, 경찰을 동원하여 봉기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이때 농민 1만~4만 명이 사망했다. 봉기의 주모자인 파라분도 마르티(Farabundo Martí)도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주 엘리트들은 공산주의 운동 진압에서 군사독재정권의 유용성을 확인하고 그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마르티네스는 1933년 7월에 1935년 대선을 대비하여 엘살바도르의 유일 합법정당으로 국민정당 "조국을 위하여"(Partido Nacional "Pro-Patria")를 창당했다. 해당 정당은 마르티네스 자신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로 구성된 최고위원회에 통제되었다.마르티네스는 대공황으로 닥친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겔 토마스 몰리나(Miguel Tomás Molina)를 재정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정부 재정수입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즉각적인 긴축 모드에 돌입하여 대규모 예산삭감과 공무원 임금 30% 삭감(군인 제외)을 단행했다. 또한 대출 상환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채무의 만기를 연장하고 이율을 인하했다. 1932년 2월 23일에는 1922년 미국과 영국에서 빌려온 채무의 이행을 중단했다. 채무의 이행은 1932년과 1936년의 재조정을 거쳐 재개되었으나 1933년 정치적인 이유로, 1937년과 1946년 커피 가격 하락을 이유로 수차례 중단되었다.
2.2. 대통령 재임기(2차)
마르티네스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동경하였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처럼 보이려고 하였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1935년, 1939년, 1944년 대선에서 마르티네스는 모두 득표율 100%로 당선되었다. 1939년 헌법 개정은 엘살바도르의 지방 행정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차상위 행정구역인 무니시피오(Municipio)[2]의 장인 알칼데(Alcalde)[3]는 주민이 뽑는 선출직이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는 임명직이 되었으며, 무니시피오의 의회만 주민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각 무니시피오의 장이 현역 장교들로 교체되어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경제적으로는 커피 외의 수출 작물 다변화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커피 단작농업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구조는 그가 몰락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마르티네스는 통화인 엘살바도르 콜론의 안정화를 위해 중앙은행(Banco Central de El Salvador)을 설립하고,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와 쿠스카틀란 대교(Puente Cuscatlán)를 건설하는 등 각종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35년 2월에는 나시오날플로르방카 경기장(Estadio Nacional Flor Blanca)[4]을 완공하고 3월 16일 이곳에서 제3회 중미카리브게임(III Juegos Centroamericanos y del Caribe) 개최를 선언했다.[5] 마르티네스는 채무 재조정과 이행을 반복하면서도 1937년 6월 국회연설을 통해 향후 정부는 어떠한 대출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이른바 "마르티네스 독트린"을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수출 대상국은 미국과 독일이었는데 독일의 경우 단순 경제적 교류에 그치지 않고 정치 및 군사까지 교류의 분야가 확대되었다. 장교들은 1936년부터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독일군 대령인 에버하르트 본스테트(Eberhardt Bohnstedt)가 엘살바도르의 "헤라르도 바리오스 대장" 사관학교(Escuela Militar "Capitán General Gerardo Barrios")에서 교장을 맡았다.[6] 그밖에 이탈리아는 엘살바도르의 커피와 자국산 비행기 부품 및 탱크로 개조 가능한 트랙터를 물물교환했다.
2차대전으로 독일의 커피 시장이 폐장하면서 엘살바도르의 무역은 더더욱 미국에 집중되었다. 국내에서는 1940년 말 수출이 침체하면서 실업률이 급증하고 군부 내에서는 반대파가 득세했다. 엘살바도르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1942년 2월 2일 미국과 랜드리스 협정을 체결했다.# 마르티네스 독트린은 당분간 랜드리스의 혜택을 받기 위해 중단되었다. 마르티네스는 어쨌건 임기 중에 외채 대부분을 이행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자까지 모두 갚은 것은 1960년이 되어서였다.
2.3. 몰락
1944년 4월 2일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진압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주모자를 포함해 30명을 처형한 직후 대규모 민중봉기가 발생하고 미국 시민이 경찰에 살해되어 미국마저 지지를 거두자 같은 해 5월 9일에 사임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임 후에도 군사독재자들의 집권이 이어졌다. 마르티네스는 1955년 7월 잠시 귀국했는데 그가 재임기 저지른 범죄를 기소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다시 외국으로 떠났다. 1966년 온두라스 하마스트란(Jamastrán)에서 개인 택시기사 시프리아노 모랄레스(Cipriano Morales)에 살해당했다.3. 여담
개인적으로는 매우 청렴하여 퇴진 후 망명 비용조차 없을 정도였고 할 수없이 지지자에게 급전을 구해 망명한 다음 그에게 돈을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티네스는 이런 도덕관뿐만 아니라 그의 희한한 종교와 기행으로도 유명해졌다. 가톨릭 일색인 중미의 다른 독재자들과 달리 마르티네스는 신지학자로서 오컬트를 진지하게 믿었다. 1944년 4월 산살바도르 대주교 루이스 차베스 이 곤살레스(Luis Chávez y González)가 "신의 이름으로" 쿠데타 주모자들의 처형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자, 마르티네스는 차베스에게 "내가 엘살바도르의 신이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어린 아들이 병에 걸렸을 때는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고 파란 유리병에 담아서 양지바른 곳에 놓아둔 물로 치료하고자 했는데 결국 그 아들은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특이하게도 아버지의 성인 에르난데스보다 어머니의 성인 마르티네스로 더 많이 불린다. 본 문서도 마르티네스로 부른다.
그의 임기 중 스위스 제네바 총영사(1942~1945)였던 호세 카스테야노스 콘트레라스(José Castellanos Contreras)는 엘살바도르 시민증을 위조 발급하는 방법으로 유대인 4만명을 홀로코스트에서 구출하여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목록에 등재되었다.
[1] 엘살바도르는 임시 대통령의 대수도 순서대로 계수하며, 중간에 물러났다가 복귀해도 따로 대수를 세지 않는다.[2] 일반적으로 "주"(州)로 번역되는 최상위 행정구역 데파르타멘토(Departamento)의 바로 아래 단위이다.[3] 대한민국의 시장, 군수에 대응한다.[4] 현 "마술사" 호르헤 곤살레스 경기장(Estadio Jorge "El Mágico" González)[5] 관련 일화가 있다. 공무원들이 공짜로 표를 구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마르티네스는 경기장 매표소 앞에서 직접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린 후 돈을 내고 입장권을 샀다. 이에 공무원은 물론이고 전 국민들이 공짜로 경기를 구경할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6] 이 학교는 웃기게도 장장 48년에 걸친 군사독재기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을 다수 배출하면서 "대통령들의 학교"라는 별명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