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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비두카/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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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멜버른 나이츠 FC

1975년 10월 9일 크로아티아계 호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는 1993년 18살의 나이에 크로아티아 출신 이민자들이 설립한 프로축구 클럽인 멜버른 나이츠에 입단했다. 비두카는 이 시기 호주 축구 리그를 문자 그대로 씹어먹었다. 그는 2 시즌 동안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호주 선수였고 (48경기 40골) 한 해에 가장 잘한 호주 선수에게 주어지는 '조니 워렌 상을 2차례 수상했으며 리그를 한 차례 우승했다. (1994-1995 시즌) 이러한 그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멜버른 나이츠 측은 홈 경기장 '나이츠 스타디움'에 '마크 비두카 스탠드'를 설치해 기념하고 있다.

2. GNK 디나모 자그레브

파일:external/www.smh.com.au/1452844875485.jpg

1995년, 비두카는 조상님 나라 크로아티아의 명문 프로축구 클럽인 GNK 디나모 자그레브로 이적했다. 그는 이 팀에서 3년 반을 뛰면서 84경기에 출전해 40골을 기록했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크로아티아 리그 우승을 3번 연속 달성했으며 컵 대회에서도 3연속 싹슬이했다. 또한 1997년에 유로파컵 예선 3라운드를, 이듬해에는 챔피언스리그 조별 예선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3. 셀틱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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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98년 12월, 셀틱이 그를 영입하려고 접근했고, 며칠 후 350만 유로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계약서에 사인한 직후, 비두카는 돌연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길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훈련장에서 공을 차보지도 않고 셀틱을 이탈해 버렸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자그레브 측이 이적료가 너무 적다며 클레임을 제기했다. 이로 인해 벌어진 법정다툼은 비두카가 1999년 2월 셀틱 U-21팀에서 셀틱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출전함으로서 간신히 수습되었다.

좀 시끄러운 잡음을 겪으며 셀틱에 입단하긴 했지만, 비두카는 이후 셀틱 최강의 공격수로 자리잡는다. 그는 첫 풀 시즌인 1999-2000 시즌에 27골을 몰아넣으며 스코틀랜드 리그 올해의 선수와 득점왕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스코티시 리그컵에서도 우승을 하였다. 그는 기술이 있는 축구 선수로 꼽혔는데, 특히 상대 선수들이 달려들어서 공을 뺏으려 들때 이를 절묘하게 회피하며 가지고 노는 능력이 대단했다. 시즌이 끝난 후, 비두카는 당시 야심만만하게 대권에 도전하고 있던 리즈로 전격 이적했다.

4. 리즈 유나이티드 FC

파일:external/static.goal.com/109855.jpg



2000년 여름, 비두카는 5년 계약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즈에 입단했다. 당시 리즈의 감독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비두카가 해리 큐얼과 마이클 브리지스와 함께 공격진 삼각편대를 형성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해리 큐얼과 마이클 브리지스는 잦은 부상에 시달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비두카는 리그에서는 로비 킨과,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앨런 스미스와 함께 투톱을 형성해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2000-01 시즌, 비두카는 토트넘 홋스퍼와 홈경기에서 멀티골을 넣으며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넣었으며 엘런드 로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4골을 몰아넣으며 4:3 승리에 크게 일조하며 본인의 인생경기 본인의 인생경기를 찍는등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고 UEFA 챔피언스 리그 H조 조별리그 베식타스에게 1골 1도움으로 호주 선수 최초 챔피언스 리그 득점을 기록하였다. 16강 4조 조별리그에서는 RSC 안데를레흐트, 레알 마드리드, SS 라치오에게 3경기 연속골과 2개의 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까지 더해져 종합 53경기 22골을 기록하며 팀을 프리미어 리그 4위에 올려놨고 호주 선수 통산 및 단일 시즌 최다 챔피언스 리그 득점과 프리미어 리그 단일 시즌 최다 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비두카는 어렸을 때 응원했던 AC 밀란의 관심 대상이 되었지만 결국 이적은 성사되지 않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알렉스 퍼거슨과 면담을 가졌으나 이적하지 않기로 하였다.



2000-01 시즌: 53경기 22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4 34 0 17[2] 1
FA컵 2 2 0 1 0
UEFA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2 2 0 0 1
칼링 컵 1 1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14 14 0 4 4
합계 53 53 0 22 6

2001-02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 아스날을 상대로 해리 큐얼의 어시스트를 받아 득점을 기록하여 승리를 안겨주었다. 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선제골을 넣었으나 경기 막판 솔샤르에게 동점골을 내주며 1대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UEFA컵 2라운드 트루아 AC에게 홈에서 2골 1도움, 원정에서 1골 1도움으로 다음 라운드 진출에 공헌을 하였으다. 프리미어리그 18라운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3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였으나 3대4로 패하였다. 31라운드 부터 레스터 시티, 토트넘 핫스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3경기 연속 골을 넣는 등 리즈의 든든한 공격수로 활약하며 팀을 프리미어 리그 5위에 올려놓았다.

2001-02 시즌: 42경기 16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33 0 11 2
FA컵 1 1 0 1 0
워딩턴 컵 1 1 0 1 0
UEFA 컵 7 7 0 3 2
합계 42 42 0 16 4

2002-03년 시즌에는 프리미어 리그 29R 부터 10경기 14골이라는 미친 듯이 득점포를 가동하였는데 찰튼 애슬레틱에게 헤트트릭을 하며 팀은 6:1로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는 본인의 프리미어 리그 두번째 헤트트릭이다. 리그 20골을 기록하며 2000-01 시즌에 이어서 두번째로 리그 득점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팀을 가까스로 강등권에서 구해냈다.

2002-03 시즌: 39경기 21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29 4 20[3] 2
FA컵 3 3 0 1 0
워딩턴 컵 1 1 0 0 0
UEFA 컵 2 2 0 0 0
합계 39 35 4 21 2

그러나 리즈 보드진은 대권을 향한 야망에 지나치게 불타오른 나머지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2002년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한 후 극심한 재정 적자로 주전 선수들을 대거 팔고 말았다. 급기야 2003-04 시즌엔 비두카의 팀 동료였던 로비 킨, 해리 큐얼을 비롯한 수많은 주전 멤버들이 다 떠나갔고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급히 데려온 임대 및 자유계약 영입선수들이 모조리 실패하는 바람에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비두카는 이 와중에도 분전해 2003-04 시즌에 종합 31경기 12골[4]을 기록하며 본인 역시 프리미어 리그 4시즌 연속 두자릿수 득점이라는 호주 축구의 역대급 개인 성과를 냈지만 리즈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FC 바르셀로나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를 영입하려고 하는데, 그 대상이 비두카라는 소문이 났다. 또한 리버풀 FC라든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등 프리미어 리그 구단들이 그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볼튼 원더러스와의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마지막 경기였는데 4:1로 패했으며 비두카는 패널티킥으로 만회골을 넣은 후 두 장의 옐로 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이 경기로 결국 리즈는 강등이 확정되었고, 이로서 본인의 리즈 유나이티드 4시즌 통산 166경기 72골[5]을 뒤로한채 비두카는 리즈를 떠나 미들즈브러로 이적했다.

2002-03 시즌: 31경기 12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0 30 0 11 3
FA컵 1 1 0 1 0
합계 31 31 0 12 3

5. 미들즈브러 FC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295278-046D58A00000044D-167_634x391.jpg

이적료 450만 파운드에 미들즈브러로 이적한 뒤, 비두카는 2004-05 시즌 초반 5경기 3골을 넣으며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온갖 부상에 시달려 경기력이 감퇴되어 이후 11경기에서 2골을 넣는데 그쳤다.

2004-05 시즌: 22경기 7골 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6 15 1 5 0
칼링컵 1 1 0 2 0
UEFA 컵 5 3 2 0 0
합계 22 19 3 7 0

하지만 2005-06 시즌에는 폼을 회복해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는데, 버밍엄에서의 기가 막힌 발리슛을 포함해 시즌 종합 43경기 16골[6]을 기록하며 개인통산 5시즌 두자릿수 득점을 달성했다. 특히 유로파 컵에서 9경기 6골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선보여 미들즈브러가 유로파 컵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다만 유로파컵 결승전에선 아쉽게도 세비야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05-06 시즌 버밍엄과 프리미어 리그 28R 경기에서 나온 발리슛

2005-06 시즌: 43경기 16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7 19 8 7 3
FA컵 5 3 2 2 0
칼링컵 2 2 0 1 1
UEFA 컵 9 8 1 6 1
합계 43 32 11 16 5

이후 2006-07 시즌, 2006년 8월, 그는 미들즈브러에서 자신이 이전 클럽에서 선호했던 등번호 9번을 받았으며 비두카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자 당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미들즈브러와 재계약해 주기를 공식적으로 희망했다. 특히 비두카가 시즌 종합 37경기 19골[7]을 넣으며 개인 6번째 시즌 종합 두 자릿수 득점과 개인 5번째 리그 득점 두자릿 수까지 기록하는 동시에 미들즈브러 팀내 득점 1위까지 기록하면서 그를 어떻게든 잔류시키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비두카는 재계약을 거부하고 시즌이 끝나자 자유계약 선수가 되어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다. 그런데 뉴캐슬은 미들즈브러의 더비 라이벌이다. 이 때문에 미들즈브러 팬들은 격노해 그의 직업 윤리가 의심스럽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여담으로 미들스브러로 이적해온 이동국의 적응을 도와주며 이동국의 당시 나이(30세)에 대해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라며 응원해주었다고 한다.

2006-07 시즌: 37경기 19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9 22 7 14 3
칼링컵 1 1 0 0 0
UEFA 컵 7 6 1 5 0
합계 37 29 8 19 3

6.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1189694-00CF502A00000578-796_468x355.jpg

비두카는 뉴캐슬로 이적한 후 2007년 8월 11일 볼튼 원더러스 FC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그는 8월 26일 미들즈브러 FC와의 경기에서 어마어마한 야유를 퍼붓는 미들즈브러 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즌 첫번째 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살이 많이 찐데다 볼튼에서 성공한 이후 오만해진 샘 알라다이스 감독의 '닥치고 내 말 들어'식 지도 방식에 반기를 드는 바람에, 팀 내 입지가 좁아졌다. 그러다가 샘 알라다이스가 경질되고 케빈 키건이 부임하면서 조금씩 폼을 끌어올려서 시즌 막판에 골을 몰아넣으며 리그 27경기 7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8-09 시즌, 비두카는 키건 감독이 보드진과의 불화 끝에 사임해 버린 후 혼란에 휩싸인 뉴캐슬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고 살이 너무 쪄서 더이상 왕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12경기 0골이라는 초라한 기록만 남긴 채 뉴캐슬이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그는 만 3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2007-08 시즌: 28경기 7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6 19 7 7 1
칼링컵 2 2 0 0 1
합계 28 21 7 7 2

2008-09 시즌: 12경기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2 6 6 0 2


[1] 공산주의와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문에 상당수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호주로 대거 이민을 떠났다. 영국계 주민들이 주로 크리켓같은 것을 할 때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은 대부분 축구를 했다. 호주 축구대표팀에 크로아티아계 선수가 많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2] 리그 4위[3] 커리어 하이, 리그 4위[4] 리그 30경기 11골[5] 리그는 130경기 59골[6] 리그 27경기 7골, 컵대회 16경기 9골[7] 리그에서 29경기 14골, 컵대회 8경기 6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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