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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5:50:27

마미아 구리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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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17대 군주
მამია გურიელი | 마미아 구리엘리
제호 한국어 마미아 구리엘리
조지아어 მამია გურიელი
라틴어 Mamia Gurieli
가족 기오르기 구리엘리(아버지)
카이호스로 2세 구리엘리(형제)
엘레나(첫째 아내)
타마르(둘째 아내)
기오르기 4세 구리엘리(장남)
카이호스로 3세 구리엘리(차남)
니콜로즈(삼남)
레반(사남)
타마르(장녀)
생몰 년도 미상 ~ 1714년
재위 기간 1701년 ~ 1702년(1차 재위)
1711년 ~ 1712년(2차 재위)
1713년 ~ 1714년(3차 재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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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17대 군주.

2. 생애

구리아 공국의 공작이자 2차 이메레티 왕국 13대 군주인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과 바그라트 5세의 미망인이었던 타마르의 아들이다. 형제로 카이호스로 2세 구리엘리가 있었다. 1684년 아버지가 로키티 전투에서 알렉산드레 4세가 이끄는 이메레티군에게 패하고 전사한 뒤, 카이호스로와 함께 아할치헤로 달아났다.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는 1685년 카이호스로에게 투르크군을 맡겨 구리아로 돌아가서 알렉산드레 4세가 임명한 구리아 공작이자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형제인 말라키아를 쫓아내게 했다. 말라키아는 아할치헤로 도망쳤고, 유수프 파샤는 말라키아와 카이호스로를 화해시켰다. 카이호스로는 말라키아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말라키아가 구리아로 돌아오자 곧바로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다. 이에 분노한 유수프 파샤는 군대를 파견하여 구리아를 정벌했다. 1689년, 카이호스로 구리엘리는 투르크군의 초대를 받고 들어갔다가 피살되었고, 눈이 멀었던 말라키아가 구리아를 통치했다.

얼마 후, 유수프 파샤는 구리아인들로부터 카이호스로의 동생인 그를 말라키아와 함께 통치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수락했다. 이리하여 구리아로 돌아온 그는 카이호스로의 신부였던 엘레나 아바시제와 결혼했다. 말라키아는 나중에 셰모크메디 수도원수도자가 되었다. 1690년, 그는 추방당한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를 맞이했다. 그러나 자신의 가신들이 기오르기 11세를 추종할 기미를 보이자 기오르기 11세를 압박해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는 고니오로 떠나게 했다. 1698년 오스만 술탄 무스타파 2세의 지시를 받은 아할치헤의 셀림 파샤가 시몬 왕자를 앞세워 이메레티로 쳐들어오자, 그는 즉시 시몬의 편을 들어 아르칠리 왕을 몰아냈다.

얼마 후 시몬이 중앙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딸이자 기오르기 5세의 미망인인 타마르와 갈등을 벌이다 귀족들의 외면을 받자 카르틀리로 피신했다. 이후 기오르기 아바시제가 섬정으로서 이메레티를 통치하자, 그는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두려워해 시몬을 왕좌에 다시 앉히기로 마음먹고, 셀림 파샤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셀림 파샤는 헤라클리오스 1세에게 시몬을 아할치헤로 보내라고 했고, 시몬이 오자 다시 구리아로 보냈다. 그는 시몬에게 아내이자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또다른 딸인 아니카와 이혼하고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하라고 권고해 성사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 위협을 느낀 기오르기 아바시제와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사칠라오에서 군대를 모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시몬을 죽이고 왕위를 스스로 찾이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혹해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고, 1701년 자객을 보내 시몬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기오르기 아바시제가 왕실 영지와 수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그는 구리아 신민을 노예로 팔아서 재원을 충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1702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에 의해 폐위되어 구리아로 달아나야 했고, 기오르기 아바시제는 기오르기 6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1707년 기오르기 6세가 퇴위하고 시몬의 동생인 기오르기 7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시몬을 죽인 그에게 원한을 품고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구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지만, 그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물러났다. 1711년 이메레티 귀족들은 기오르기 7세를 축출하고 그를 복위시켰다. 카르틀리 왕국으로 물러난 기오르기 7세는 바크탕 6세의 영접을 받고 다시 삼츠헤로 가서 이삭 파샤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기로 했다. 1712년, 기오르기 7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진군했다. 그는 이에 맞서 출진했지만, 취하리 전투에서 패배한 뒤 라차로 도피했다.

1713년, 그는 밍그렐리아 공국, 라차, 아다시드제와 함께 기오르기 7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연합군은 오크리베 전투에서 왕실군을 물리쳤고,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이리하여 이메레티 왕위에 세번째로 올랐지만 1714년 1월에 사망했고, 아할치헤의 파샤로부터 원조를 받은 기오르기 7세가 재차 이메레티로 진군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1698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딸 엘레나와 첫번째로 결혼했지만 장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지자 1711년 이혼하고 라차 공작 파푸나 1세의 딸인 타마르와 재혼했다. 타마르는 1713년 남편이 사망한 뒤 기오르기 7세와 재혼했고 1716년 사망해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장남 기오르기 4세 구리엘리는 구리아 공작을 이어받았고 나중에 기오르기 7세의 뒤를 이어 이메레티 왕이 되었다. 차남 카이호스로 3세 구리엘리는 형 기오르기 4세 구리엘리에 맞서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다. 삼남 니콜로즈는 세목메디 주교를 지냈으며, 사남 레반은 구리아 공작을 자칭하며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되었다. 장녀 타마르는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기오르기 4세 다디아니와 결혼했다가 1714년 이혼하고 1716년 기오르기 7세와 결혼했다. 또한 아할치헤의 아슬란 파샤, 기오르기 셰르바시제의 아내들이 그의 딸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