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투조종사가 된 시골 촌뜨기
1915년에 오리건주의 허바드(Hubbard)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마리온 E. 칼은 홉을 재배하는 부모님의 뒤를 이어 농부가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고향 친구들이 공부보다는 농사로 진로를 정했지만, 소년 칼은 이와는 달리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 조종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기로 결심했다. 오리건 대학교에 입학해 항공역학을 공부하면서 학사장교 프로그램을 병행한 그는 졸업할 때 학위를 따 공학자가 될 수 있었지만 연구실에서 도면을 뒤적이는 것보다는 직접 조종간을 잡고 조종석에 앉기를 원했다. 1939년 12월, 청년 마리온은 미 해병항공대에 지원하여 버지니아 주의 콴티코(Quantico) 기지에 있는 VMF-1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해병대 최초의 에이스 파일럿이 될 첫 발걸음이었다.2. 역사를 바꾼 5분을 위해
많은 조종 생도들이 열정과 자신감만을 믿고 조종사가 되는 길을 택했지만 그 모두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마리온 소위는 열정을 뒷받침해줄 소질이 있었고, 얼마 안가 해병 항공대에서 기량을 인정받아 비행교관으로 임명되어 샌디에이고에 주둔하고 있던 VMF-221로 소속을 옮기게 된다.1941년 12월 7일, 진주만에 공습을 받고 완벽하게 허를 찔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지만, 태평양 함대를 거의 모두 잃어 전선 각지에서 힘겹게 악전 고투를 이어가야만 했다. 마리온 칼이 소속된 VMF-221은 아직도 구식 F2A 버팔로와 신형 F4F 와일드캣을 섞어서 장비하고 있는 혼성 비행대였고 원래 웨이크 섬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웨이크가 미군의 예상보다 빠르게 함락되면서 1941년 크리스마스에 운명의 섬 미드웨이에 도착하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 당일, 칼이 소속된 VMF-221은 비행장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일본 해군의 함재기 대편대에 용감히 맞서 25대가 출격했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은 오직 버팔로 2대였을 정도로 전멸에 가까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렇지만 미드웨이 방공대가 흘린 피의 댓가로 일본 해군의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제1항공함대는 투입한 전력의 20%를 잃으면서도 미드웨이 비행장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없었고 결국 다시 섬을 공격하기 위해 대함 공격을 준비하도록 어뢰를 싣고 있던 97식 함상공격기들의 무장을 전부 폭탄으로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나구모가 내린 이 오판은 결과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은 물론이고 태평양 전쟁의 향방을 바꿔버렸다.
무장 교체를 위해 항모들의 갑판이 폭탄으로 가득찬 상태에서 웨이드 맥클러스키, 클라렌스 디킨슨, 그리고 딕 베스트 같은 급강하 폭격의 명수들에게 노출된 일본군의 항모 카가, 아카기, 소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히류까지 그대로 불바다가 되어 가라앉았다. 마리온 칼을 위시한 해병대 조종사들의 필사적인 분투가 없었다면 제1항공함대는 미 항모들을 타격했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모를 모두 잃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되었을 것이다.
3. 영웅들의 부대
마리온 칼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1대의 A6M 제로를 격추했지만 자신 역시 피탄 당해 활주로에 불시착했었다. 칼과 존 스미스(John L. Smith : 1914~1972 / 19킬)를 포함해 살아남은 해병 조종사들은 하와이로 돌아와 잠시 충전과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VMF-223으로 재편성되었고, 기체도 F4F 와일드캣으로 갈아타고 태평양 전쟁의 분기점이 된 전장인 과달카날 섬으로 파견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군은 일본군 뿐만이 아니라 이질과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과도 싸워야만 했고 일본군으로부터 미 해병대가 빼앗은 핸더슨 비행장에는 수시로 일본군 저격병이 쏜 총알이 날아들었다. 최악의 환경에서 최악의 적을 상대하게 된 마리온 칼이었으나 그는 미드웨이에서 죽어간 동료들의 복수를 갈망하고 있었다.마리온 칼 중위는 8월 24일 하루 동안 제로센 1대, 1식 육공 1대, 97식 함공(九七式艦上攻撃機) 2대를 줄줄이 격추시키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줬고 30일까지 6대를 더 격파했다. 마리온 칼은 미드웨이에서 격추한 1대와 24일 떨군 4대를 더해 전 세계의 모든 해병대 파일럿 중에서 처음으로 에이스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핸더슨 비행장에 둥지를 튼 캑터스 비행대는 훗날 6명의 명예훈장 수훈자를 배출하는 대활약을 펼치면서 미 해병대 뿐만이 아니라 육해군의 어떤 비행대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정예 부대로서 과달카날의 하늘을 지배했지만, 아쉽게도 마리온 칼 본인은 명예훈장을 목에 걸지는 못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부터 함께 했던 VMF-221의 생존자 존 스미스와 캑터스 비행대의 지휘관이자 13대를 잡아낸 로버트 갤러(Robert E. Galer : 1913~2005 / 13킬) 소령, 해병대 최고의 탑건으로 등극한 조 포스(Joe Foss : 1915~2003 / 26킬) 대위, 일본군 에이스 2명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해롤드 바우어(Harold W. Bauer : 1908~1942 / 11킬) 소령, 1회 출격에 6대를 잡은 제퍼슨 드블랑(Jefferson J. DeBlanc : 1921~2007 / 9킬) 중위, 그리고 난생 처음 실전 출격을 했으면서도 9대를 떨구는 충격적인 전과를 세우며 화려하게 데뷔한 제임스 스웨트(James E. Swett : 1920~2009 / 15.5킬) 등 과달카날 전역에서 명예훈장을 받은 에이스는 모두 마리온 칼과 함께 싸운 캑터스 부대원이었다.
4. 사사이 준이치와 승부
이처럼 훈장 복은 없었지만 조 포스, 존 스미스에게 추월되기 전까지 미 해병대 탑 에이스 자리를 지켰던 마리온 칼은 뛰어난 승부사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일본 해군의 숙련된 베테랑들과 싸운 탓에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다. 미군 조종사들이 착륙하는 틈을 노린 적기들이 비행장을 덮치자 마리온 칼은 1대의 제로센에게 꼬리를 물리게 되었다. 마리온 대위는 위기를 감지하고 곧바로 급기동을 펼쳐 떨궈내려 했지만 그의 뒤에 붙은 조종사는 일본 해군 장교 중에서 최고의 격추수를 거두고 있어 "라바울의 리히토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사사이 준이치였다. 사카이 사부로나 니시자와 히로요시 같은 에이스도 인정한 탁월한 실력을 갖춘 준이치 중위에게 꼬리를 잡힌 칼은 기총소사를 얻어맞으며 위기에 몰린 와일드캣을 조종하다가 대담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가 떠올린 최후의 수단은 목숨을 건 감속이었다.적기가 꼬리에 바짝 붙어 쫓기는 상황에서 탑승기의 속도를 급격히 줄이는 감속 기동은 상대가 추월해버린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지만 반대로 속도가 뚝 떨어진 자신의 뒤에 붙은 적기의 코 앞에 엉덩이를 내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온 칼이 모는 F4F-4 와일드캣은 제로보다 둔중한 대신 훨씬 튼튼했으며, 뒤통수는 기관총탄쯤은 거뜬히 막아내는 장갑판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마리온 칼 대위는 스로틀과 프로펠러 피치를 콱 조이는 동시에 러더 페달을 차면서 기체를 옆으로 흐르게 했다. 칼의 뒤를 바짝 쫓고 있던 준이치는 와일드캣의 갑작스러운 감속을 따라가지 못한 채 그대로 추월했는데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벌이진 일이었다.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킨 마리온 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 앞에 적기를 향해 6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을 전부 퍼붓자 준이치가 탄 제로센은 공중에서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비행장 상공의 공중전을 지켜보던 모든 미군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잠시 후 승자가 된 칼 대위가 당당하게 착륙했다.
나중에 자신이 잡은 제로센에 타고있던 그 솜씨좋은 파일럿이 사사이 준이치 중위라는 것을 알게 된 마리온 칼은 해변가에 떨어진 잔해 속에서 주워온 산소탱크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5. 2번째 파병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1년간 전투 임무 대신 교관 임무를 맡은 칼은 1943년 말에 다시 전선에 복귀해 과달카날에서 자신이 소속된 비행대였던 VMF-223의 비행대장에 자원했고 와일드캣이 아닌 신형 F4U 콜세어로 2대의 전과를 더 추가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의 격추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칼은 2차 대전 동안 미 해병대원으로서는 7위에 해당하는18.5대의 격추 기록을 세웠으며 해군 십자훈장을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전역에서 각각 수여받았다.한국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고 미 해병대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음속 돌파에 도전하는 더글라스 스카이스트릭(Douglas D-558 Skystreak) 같은 실험기들을 조종한 칼은 캑터스 비행대원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 경력을 쌓아가게 된다. 베트남전 무렵에는 소장이 된 마리온 칼 장군은 남베트남에 파병된 제1해병 원정군의 군용기들을 진두지휘했다. 베트남전에서 칼의 지휘를 받은 미 해병항공대는 공중전을 겪을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지상지원 임무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제2의 디엔비엔푸'라고 불리던 케산 포위전에서 위기에 처한 미군들을 사실상 공중지원만으로 요새의 포위를 풀어버려 현대 공군력의 위력을 새삼 만방에 알렸다.
이런 해병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은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정치적인 딜레마에 허우적댄 미국의 패배로 끝났으며, 이에 실망한 마리온 칼 소장은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군복을 벗고 전역했다. 퇴역한 후에는 전투 조종사와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1994년에 친구 배럿 틸먼(Barrett Tillman)과 함께 Pushing the Envelope라는 제목의 자서전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6. 아내와 자신의 목숨을 바꾸다
1998년에 6월 28일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가 거실로 가자 어떤 침입자가 아내에게 산탄총을 겨누고 돈과 차 열쇠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칼은 망설이지 않고 강도에게 달려들며 아내의 머리를 움켜 쥐고 엎드렸지만, 강도가 방아쇠를 당겼고 이에 부상을 입었다. 그 강도는 쓰러진 칼에게 한 발을 더 쏜 다음 현금을 털어 차를 훔쳐 줄행랑을 쳤다. 아내의 목숨은 구했지만 그 자리에서 숨진 마리온 칼은 충격과 비탄에 빠진 유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영웅을 죽인 19세의 살인자 제시 파너스(Jesse Fanus)는 범행 일주일 후에 체포되었다. 1999년 4월, 그는 두 건의 잔혹한 살인죄와 11건의 중범죄에 대한 혐의에 관해 검사측으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 2003년에 오리건주 대법원은 배심원 만장일치로 그에게 유죄를 판결하면서 사형을 선고했다. 2011년 12월에 형무소의 부적절한 진술로 판결이 뒤집혔지만, 파너스는 2015년 5월 7일에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도 복역 중이다.
부인 에드나 여사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