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텔로로 분장한 마리오 델 모나코. 안 그래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과 뛰어난 성량, 어두운 목소리 등, 오텔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던 성악가였는데, 하도 많이 부르다 보니 세월이 지나갈수록 곡 해석력은 더해져만 갔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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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rio Del Monaco (마리오 델 모나코)1915년 7월 27일(피렌체) ~ 1982년 10월 16일(향년 67세, 베네치아 메스트레)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드라마틱 테너. 별명은 황금의 트럼펫이며,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니셜만 따와 MDM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2. 상세
처음에 성악을 배울때는 바리톤인 줄 알았으나 배우면 배울수록 낼 수 있는 음이 점점 올라가서 테너라는 걸 깨닫게 된 케이스이다. 실제로 그가 바리톤으로 녹음하고 출연한 영상이 있다. 그에게 발성을 가르친 멜료끼와의 인연은 각별한데 멜료끼는 그 당시 이름난 발성교사로 고음에서 후두를 내리고 공기를 더 공급하여 고음을 강하게 내는 창법의 선구자로 명성이 자자했다.마리오 델 모나코는 타고난 성대가 아주 강했고 원래 호흡이 좋앗는지 복식호흡 등으로 더 강해졋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델 모나코는 복식 호흡으로 그랜드피아노를 밀어낼 정도로 복압이 강했다고 한다.중간에 성악 교사를 한 번 바꾼 적이 있는데 그 성악 교사는 '델 모나코는 체구가 작은데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델 모나코를 레제로 테너로 키우려고 했다.(...)[2] 이런 어이없는 교육법 때문에 델 모나코는 몇 달 후에 목소리가 작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래 선생인 멜료끼에게로 돌아갔으나 거절당했으며, 거듭된 요청과 사죄를 통해서 다시 멜료끼에게 배울 수 있었다.
1963년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 한쪽 뼈가 8조각이 나는 부상을 입고 다신 걸을 수 없다는 얘기도 듣고 노래실력에도 타격이 있었으나 몇 년간의 피나는 재활과 노력으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때 사고는 심각해서 발목 아래로는 감각이 없었고 병원에 입원에 있는 도중 간염까지 걸려 말그대로 죽다 살아났다. 사고가 난 당시에도 High C를 불러보고 소리가 나오는 것을 확인 후 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3. 가창 성향
델 모나코의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이 대사를 뱉으면서 천둥과 번개를 소환하는 트럼펫 연주를 목으로 하는 걸 들을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델 모나코의 가창 영상을 보면 고음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붓기 위해 몸을 펼쳐 최대한 숨을 마신 후, 호흡을 횡격막으로 고정시킴과 동시에 바로 어깨를 제자리에 놓고 턱과 성대를 가깝게 붙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상태에서 뿜어내는 고음은 극장에 가득찬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비싼 좌석이든 싼 좌석이든 상관없이 같은 크기의 소리를 듣고 있는 상태인데 이것은 모든 성악가들의 꿈의 경지이다.
성악가 대부분은 노래를 부를때 어깨가 잘 움직이질 않고 중간중간 쉬는 부분에서 어깨가 움직인다. 노래를 할때는 거의 복식호흡으로만 고음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오 델 모나코는 그 호흡양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어깨가 들썩이면서 내려찍듯이 내려오면서 고음을 부르는데 복식을 넘어 가슴을 넘어 목 바로 밑까지 호흡을 가득가득 채운다.
유명한 다른 성악가들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악가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없애버리는데 발성으로는 목소리를 일부러 두껍게 내려고 하는 자연스럽지않은 딕션이나 자세라든지 어딘가 막힌듯한 발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껍고 가볍고 천둥처럼 내리꽂는 성량과 고음을 느낄 수 있으며 외모로는 성악가들은 다 덩치가 있고 뚱뚱한 편이라는 편견을 전혀 느낄수 없을만큼 날렵하고 마르키시오 뺨치는 수준의 미남급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연기적인 면에서도 성악가들은 노래가 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연기력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편견을 박살내버리는 드라마틱 테너에 어울리는 강렬한 눈빛과 연기력을 갖추고 있었다.
오텔로 같은 격정적이고 파워풀하며 카리스마가 있는 역할에 특화된 그의 잘생긴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델 모나코가 독일어에 능통하거나 독일에서 태어났으면 어느 정도의 불세출의 바그너 오페라 명반 등을 남기지 않았을까?"라고 탄식하는 바그네리안들도 있다.[3]
그리고 델 모나코가 현대의 드라마틱 테너와 다른점은 역시 부를때 쨍한 테너 특유의 느낌이 날카롭게 살아있다는 것인데, 다른 드라마틱 테너들이 고음이 잘 올라가는 바리톤 느낌인것에 반하여 마리오 델 모나코는 누가 들어도 쨍하고 밝은 느낌이 드는 목소리의 테너인데 목소리가 두꺼웠다.
물론 델 모나코는 성량이 워낙 커서 같이 옆에 붙어서 연습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의 노래는 귀가 아프고 머리가 울릴정도였다고 하며 샹들리에나 물컵이 있으면 흔들리는 일은 당연지사였으며, 심지어는 마이크가 없는 공연장에서 노래를 해도 공연장 밖에서 델 모나코의 가창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실로 바로 옆에서가 아닌 무대의 객석에 앉아서 들을때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들리는 아날로그 가수시대의 거의 막바지를 장식한 가수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그의 강렬함이 일부 팬들에게는 호불호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항상 고함 치는 것 아니냐?"하는 비판도 있다.[4]
4. 녹음들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강력하게 부른다. 괜히 남자의 테너란 말이 붙는 것이 아닌 셈.
노르마의 폴리오네 역. 그의 아이덴티티인 고음에서도 쫀쫀하게 붙는 성대 접지력이 돋보인다.
유명한 웨스턴 스파게티의 곡중 하나인 Ghost Riders in the Sky를 이탈리아 버전으로 부른 모습.
5. 여담
- 그의 인기는 일본에서도 대단하여 일본에도 몇 번 방문하였다. 61년도는 델 모나코의 성량과 실력이 완전히 정점에 이른 시기였는데, 델 모나코가 부른 오 솔레 미오를 한번 감상해 보면, 고음 부분에서 지진(...)이 나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5]
- 역대급으로 웅장한 목소리를 가진 드라마틱 테너이지만 평소 목소리는 매우 얇고 조용하다.
- 마리오 델 모나코는 무대 경력 기간 동안 주세페 베르디의 오텔로를 427번이나 공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217번 공연했다는 게 더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오텔로를 1번 부르는 것이 일반 오페라 배역을 3번 부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대단한 업적인 셈.
- 독일어에 비해 영어, 프랑스어는 능통한 편이었다고 한다. 61~69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안 오페라에서 공연하였고 미국에 오랫동안 체류한 영향으로 이탈리아 엑센트가 있긴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영어로는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으나 어쩌다 부를때도 중요한 부분들은 이탈리아어로 개사하여 불렀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는 프랑스어로 몇 번 부른적이 있다.
- 마리오 델 모나코는 오페라 무대에서처럼 카리스마 있는 모습만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델 모나코는 어린아이와 같은 면이나 음악을 듣고 매우 감동받는 모습이나 음악을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천진난만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일반적인 테너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 전성기에 델 모나코는 쥬세페 디 스테파노, 프랑코 코렐리와 함께 그 시대의 쓰리 테너로 군림했는데 그 중 델 모나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선두였다. 다만 그 당시의 사람들의 인식만큼 라이벌같은 관계는 아니었고 서로 간간히 안부를 묻거나 디 스테파뇨나 코렐리가 델 모나코에게 발성에 관하여 물어봤다고 하며 델 모나코는 친절히 아는 범위에서 다 알려주었다고 한다.
- 오텔로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였냐면, 죽을 후 관에 들어갈 때 입은 옷이 오텔로를 연기할 때 입은 옷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 마리아 칼라스와 같이 공연하다가 무대뒤에서 다툰적이 있는데 둘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오페라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예고도 없이 듀엣곡 끝부분을 길게 늘여서 노래한 일이 있었다. 마리오는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자신보다 호흡이 더 긴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이런 행위를 했다고 생각했고 다음 공연에서 팔세토로 더 길게 늘여서 듀엣곡을 마무리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마리아는 무슨짓이냐고 따졌고 마리오는 니가 먼저했다로 응수하다가 말다툼한 일이 있었다.
- 복식호흡을 강하게 내기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 레슬링 챔피언벨트와 비스무리한 복대를 착용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복압이 너무 강해져서 오장육부에 무리를 주어 노년에 쇠약해졌다는 얘기가 있다.
- 델 모나코가 멜료끼 창법으로 워낙 유명해서 가끔 벨칸토 창법과 멜료끼 창법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인 것처럼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멜료끼는 벨칸토에 포함되는 하위개념이다. 멜료끼 창법은 아포죠, 마스께라, 술피아토등 벨칸토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중에 단 하나도 반대하지 않으며 마리오 델 모나코는 그 모든 것을 백퍼센트 구현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를 평가하는 다큐멘터리나 인터뷰들을 보면 수많은 기라성같은 음악가들이 마리오 델 모나코는 진정한 벨칸토 싱어라며 수차례 언급한다. 혹시라도 멜료끼와 벨칸토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처럼 구분하는 사람이 교육자의 입장에 있다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 하는 사기꾼이다.
- 그가 살던 시대는 독재자들의 시대였고 실제로 수많은 독재자들이 마리오 델 모나코의 광팬이여서 그를 초대하여 환담을 나누곤 했다. 이탈리아 출신 오페라 가수에겐 뜬금없이 느껴질수 있는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에게 받은 훈장도 같은 맥락이다.
- 마리오 델 모나코를 비롯한 그 당시의 테너들은 고음을 급격하게 올려 발사하는 느낌이라면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구렁이처럼 슬금슬금 부드럽게 올리는 느낌인데 이것 때문에 파바로티는 커리어 초반에 '왜 당신은 마리오 델 모나코처럼 부르지 않습니까?'라는 식의 비판을 받자 파바로티는 자신감있게 '자신의 스타일이 앞으로 성악판도를 지배할 것'이라고 대답했다.[6]
- 유튜브에 성악학생들을 지도하는 영상들도 있는데 대부분은 테크닉을 가르쳐주기 보다는 감정을 더 실어서 훨씬더 극적으로 부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다른 성악가들의 마스터 클래스를 보면 악보에 대한 해석등이나 소리를 처리하는 미묘한 포인트를 꼼꼼하게 다듬어 가는 스타일이 대부분인데 역시 남자의 테너는 가르치는 스타일도 확연히 다른 듯하다.
- 목소리는 지문과 같다고 하지만 그래도 카테고리는 있는데 현대에는 왜 마리오 델 모나코 같은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을까 의문을 가질법도 하다. 이에 대하여 표트르 베찰라 라는 유명한 테너가 자신의 생각을 남긴 바가 있다. 거의 모든 테너는 가벼운 레파토리부터 시작해서 짬이 차면 무거운 레파토리로 넘어가게 커리큘럼이 짜여져있고 대부분의 테너들이 데뷔해서 은퇴할때까지 그와 같은 길을 걷는데 현대의 음악대학교에서는 너무 넓은 범위의 음악교육이 이루어지면서 마리오 델 모나코 같은 인재가 학교를 다닌다면 헨델이나 모짜르트를 공부하면서 적응하기 힘든 기간이 강하게 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즉 목소리가 부드러운 사람이 대부분이니 거기에 맞춰서 부드러운 노래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배우게 되는데 목소리가 강한 사람은 오히려 반대로 배워야 하거나 아예 손대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마리오 델 모나코는 실제로 벨리니의 가곡들처럼 부드럽게 불러야 하는 곡은 데뷔해서 거의 부르지 않거나 아예 부르지 않았다.(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는 폴리오네로 출연했다. 다만 폴리오네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도 나중에 모른척하고 버릴만큼 아주 찌질한 장군인데 마리오는 간이 큰 대장군처럼 불러서 해석이 맞네 틀리네 얘기는 있는 편) 부드러운 노래도 어쩌다 부르게 되면 무조건 그만의 방식대로 강하고 우렁차게 불렀다.
- 나폴리 칸초네는 그의 주요 레파토리였는데 죽기전 마지막 인터뷰에선 오페라의 아리아보다 나폴리 칸쵸네가 더 부르기 어렵다고 하였다. 아리아는 쉬어가는 구간 즉 약하게 불러도 되는 구간이 있는데 나폴리 칸쵸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full lungs 즉 숨을 가득 채워 불러야 하기 때문이라고. 참고로 이때 예시를 든 오페라 아리아가 테너 아리아 중에서도 난이도가 대단히 높은 Celeste Aida 였다.
- 마리오 델 모나코 이후로 드라마틱 테너로 분류되는 현세대 테너들은 유튜브에서 비교당하며 하루 종일 까이는게 일상적인 현상까지 되었다. 주로 놀리는 레파토리는 델 모나코에 비하면 모기소리라는 등.(...)
6. 사진들
마리오 델 모나코의 젊은 시절.
마리오 델 모나코의 나이 든 모습.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50~60년대는 오페라의 황금기로서 마리아 칼라스와도 같이 공연했다.[7]
델 모나코와 그의 아내.[8]
[1] 델 모나코의 오텔로가 너무 압도적인 명연이었기 때문에, 델 모나코가 살아있을 당시엔 후배인 프랑코 코렐리처럼 델 모나코가 출연한 오텔로를 보고 듣고 한 성악가들이 오텔로 앨범이나 출연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2] 델 모나코는 젊었을 적에 몸무게가 61kg 정도였다.[3] 실제로 그는 로엔그린과 발퀴레 등에 출현할 정도로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였으나 계약문제로 몇몇 아리아만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4] 실제로 성악을 배우러 갔는데 델 모나코의 팬이라고 하면 선생님들이 굉장히 경계하는데, 이는 억지로 쥐어짜서 강하게 부르는 버릇이 있을까봐 그렇다고 한다.[5] 여담으로, 델 모나코의 아버지는 나폴리 사람이였고 그에 대한 영향인지 마리오 델 모나코에게 있어서 나폴리 칸쵸네에 대한 애정은 상당했다.[6] 실제로 그의 말대로 요즘 성악은 99%는 파바로티처럼 고음을 다룬다.[7] 둘은 서로를 굉장히 높이 평가했으나 마리아 칼라스는 파트너로서 프랑코 코렐리를 더 선호하긴 했다.[8] 마리오 델 모나코는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다. 델 모나코의 아내는 남편이 군대에 간 사이에 극장들을 찾아가 자신의 남편에게 오디션을 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로 남편의 커리어에 지극정성으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