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 스포이다 Marian Spojda | |
출생 | 1901년 1월 4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포젠[1] | |
사망 | 1940년 4월 16일 (향년 39세) |
국적 | 폴란드 제2공화국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 | 172cm |
소속팀 | 바르타 포즈난 (?-1929) 오스트로비아 오스트루프 비엘코폴스키 (1930) |
국가대표 | 14경기 0골 (1922-1928) |
감독 | 오스트로비아 오스트루프 비엘코폴스키 (1930) 레기아 포즈난 (1930) 바르타 포즈난 (1931) 바르타 포즈난 (1931-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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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전 축구선수 출신 감독.2. 생애[2]
2.1. 이름
바르샤바 중앙 군사 기록 보고서, 올림픽 기록, 피파 경기 기록지, 폴란드 축구 협회 이사회의 공식 성명, 각종 전쟁 간행물에는 Spojda, 독일 정부 출생 증명서와 위키피디아에는 Spoida로 기재되어 있다. 스포이다가 법적으로 이름을 Spojda로 변경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다수설로 Spojda를 채택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스포이다는 포즈난의 첼시에서 축구를 배웠고 선수로 거의 평생을 보낼 바르타 포즈난에는 1916년에 입단했다.그는 1929년까지 바르타 포즈난에서 뛰면서 마지막해에 리그 우승을 거뒀다.
스포이다는 1930년에 오스트로비아 오스트루프 비엘코폴스키(Ostrovia Ostrów Wielkopolski)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2.2. 국가대표
스포이다는 1922년 9월 3일,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폴란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파리 올림픽에 참가한 기록이 있다.그는 폴란드 대표팀에서 총 14경기에 출전했다.
2.3. 이후
선수 경력을 끝내고 스포이다는 레기아 포즈난과 바르타 포즈난에서 짧게 감독 생활을 했다.1934년부터 1939년까지 스포이다는 폴란드 대표팀에서 유제프 카우자 사단의 코치로 일했다. 다만 FIFA 월드컵 경기 보고서에 의하면 1938년 월드컵 당시 폴란드 대표팀은 카우자와 스포이다의 공동 감독 체제였다. 이에 반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월드컵 때도 감독은 카우자, 스포이다는 코치였다고 한다.
1938년 9월 25일, 폴란드는 팀을 2개로 쪼개서 라트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각각 상대했다. 라트비아전에서 스포이다 혼자서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폴란드는 라트비아에 1대2로 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후 스포이다는 제3항공연대 예비역 중위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고 1940년에 카틴(Katyn)에서 NKVD에 의해 총살에 처해졌다. 1943년 독일군에 의해 수행된 발굴 작업 중에 신분증과 KS 바르타의 신분증이 발견되어 스포이다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2007년 10월 5일, 알렉산데르 슈치그워(Aleksander Szczygło) 폴란드 국방부 장관은 중위 계급을 추서했다.
3. 뒷이야기
- 스포이다는 축구 관련 업계 외에도 은행에서도 일했다.
- 스포이다는 대폴란드 봉기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바르샤바의 보병 장교 사관 학교와 제그제(Zegrze)의 통신 장교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21년 6월 1일부터 고위급 중위로 복무했으며 1934년에 그는 야로스와프(Jarosław)에 있는 제6전신대대에서 동원 임무를 맡았다.
4. 수상
- 엑스트라클라사 우승 1회: 1929(바르타 포즈난)
- 폴란드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1922(바르타 포즈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