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누일 부투미티스 (Manuel Boutoumites)1050년 (추정) ~ 1112년
십자군 전쟁기 당시 동로마 제국의 명장이자 타티키오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함께 콤니노스 왕조 시기의 재정복 전쟁을 이끈 중흥의 선두 주자들이다.
앞서 나온 타티키오스와 브리엔니오스가 각각 산악 기동전과 기병 회전에 능한 장군들이었다면, 마누일 부투미티스는 수전과 강습 상륙, 점령전에 능한 장군이었다.
해군 지휘관으로서 외국에 사신으로 향하기도 했다.
2. 군 초기의 경력
그가 사서에 처음 등장한 시대는 1070년대 중반이지만[1], 그가 활약하기 시작한 때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085년 경 둑스(Doux, 해군 사령관을 나타내는 작위)로 임명되고서부터이다.3. 십자군 전쟁 전까지
보스포로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에게 해는 동로마의 젖줄과 같은 곳으로, 흑해 연안의 폰토스에서 끝을 맺는 실크로드의 교역품이 서방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트라페준타, 시노피 등 거점 교역 지대에서 출발한 상단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착하면 거기서야 유럽 각 지역의 상단이 거래를 벌이고, 거래된 상품들은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를 거치면서 제국에 막대한 관세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10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한 튀르크인은 이제 육지를 넘어 해로에 관심을 가져 이 상권을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령 발칸 반도를 기습할 해군을 건설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으나 제국을 배신하고 스미르니에 세력을 세운 튀르크인 에미르 차카(Tzachas)는 1089년 경부터 1092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건립해 아예 에게 해의 제국령 도서 지역을 점령하고 무역로를 기습했고, 심지어 마르마라 해로 바로 진입이 가능한 니케아의 토후인 아불 카심(Apelkasem)은 1086년에서 1090년대 초반 사이 제국령 비티니아와 니코미디아를 약탈하는 것이 제국군의 반격으로 여의치 않아지자 아예 해적 선단을 조직해서 마르마라 해에 분탕을 치고자 했다.
아직 제국 해군의 재건이 완전히 완료되지 않아 베네치아 해군에 제국 해군이 꽤나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제국 앞바다에 무시할 수 없을 규모의 해적 선단이 건설되고 있는 수순이라면, 제국이 그나마 쥐고 있던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 제해권은 위협 받을 것이 뻔했다. 재정의 상당 부분을 관세와 상업세에서 충당하던 제국은 제해권을 잃을 수 없었다. [2]
알렉시오스 1세는 지속적으로 제국령 비티니아를 위협하는 아불 카심을 제압하기로 했다. 새로운 둑스 마누일 부투미티스의 함대는 비티니아의 키오스(Kios)에서 건설 중이던 아불 카심의 함대를 불태워버렸고, 그와 동시에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육군은 아불 카심의 본군이 있는 곳으로 진군했다. 아불 카심은 해군을 포기했고, 타티키오스의 육군이 접근 중이라는 것을 파악한 뒤 본인과 군대가 주둔한 곳이 지리적으로 전투에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할리케(Halykai), 또는 키파리시온(Kyparission)이라고 알려진 구릉 지대로 제국군을 유인했다.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동로마 대군은 격렬한 회전 끝에 아불 카심을 몰아내고 아불 카심의 본거지인 니케아로 진군하나 니케아까지 함락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타티키오스와 부투미티스의 제국군은 아불 카심의 위협을 제거하고 마르마라 해와 비티니아 지역의 세력권을 확고히 하며 수많은 전리품을 거두고 동로마 유민들을 구해내어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한편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토후인 차카의 위협은 1091년 - 1092년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Konstantinos Dalassenos)와 황제의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Ioannes Doukas) 대공(Megas Doux)이 이끄는 제국 해군의 반격과 알렉시오스 1세의 모략으로 일단락된다[4].
차카와의 전쟁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마누일 부투미티스는 요안니스 두카스 대공의 부관으로서 크리티(Krete)의 카리키스(Karykes)가 일으킨 반란과 키프로스의 랍소마티스(Rhapsomates)가 일으킨 반란 진압에 종군한다. 이 과정에서 부투미티스는 키프로스에 상륙해 시리아로 도주하려는 랍소마티스를 사로잡아 두카스 대공에게 넘기는 활약을 한다.[5]
4. 제1차 십자군 원정 종군
4.1. 십자군 수송 작전
1096년 마침내 1차 십자군이 제국 영내로 당도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영주는 베르망두아의 위그 백작으로, 비교적 적은 숫자인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이피로스(Epeiros)의 제국령 항구 디라히온(Dyrrhachion)으로 향했다. 그러나 디라히온 근처에 좌초한 위그 백작의 병력은 거지꼴이 되어 디라히온 공작 요안니스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형인 이사키오스 친왕의 장남)에게 신변의 보호를 받았다[6].
민중 십자군의 참사 이후, 제국은 하루 빨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십자군을 이송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마누일 부투미티스에게 위그 백작의 병력을 최대한 빨리 육로로 수도로 이송시킬 것을 명했다.
태풍으로 좌초한 상황에서 위그 백작은 제국 중앙군이 자신을 직접 호송하겠다고 한 것에 매우 만족해 득의양양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황제를 만난 이후로도 다른 십자군 기사들과 다르게 쉽게 충성 서약을 하였다. 위그 이후로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 노르만 귀족 보에몽 도트빌,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등의 영주들이 속속 도착했고, 부투미티스의 해군은 이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아시아로 옮겨가는 것을 돕는 다리 역할을 했다.
마침내 십자군 - 제국 연합군이 소아시아로 향했다. 십자군의 총 병력은 약 4만여였고, 이를 인도하는 동로마 제국 산악 보병대 펠타스트와 타티키오스 장군의 병력이 약 2천여 명이였다. 부투미티스는 수군을 이끌고 이들의 후위와 보급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훗날 상륙전을 대비해서 조립 가능한 소형선을 운반하여 가지고 다녔다.
4.2. 니케아의 총독이 되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를 포위 공격했다. 4km가 넘는 성벽, 250개의 첨탑이 줄줄히 박혀있던 도시는 16년 전만 해도 동로마 제국에서 꽤나 잘 나가는 도시였다. [7]포위가 막 시작될 무렵 룸 술탄 쿨르츠 아르슬란은 룸 술탄국 본군과 함께 아나톨리아 동부 니에케사리아(Neai Kaisareia)의 튀르크인 토후인 다니쉬멘드(Danishemend)에 대한 원정에 나서고 있었다. 니케아 시민들은 룸 술탄의 지원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알렉시오스 1세는 마누일 부투미티스를 니케아로 잠입시켜 시민들에게 항복 의사를 묻도록 했다.
니케아 시민들은 처음에는 항복 의사를 타진했으나 룸 술탄의 군대가 니케아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 의사를 철회하고 부투미티스를 도시에서 내보냈다. 남은 것은 포위 공격뿐이었다.
한 달 동안의 포위 공격속에서 룸 술탄국은 핀치에 몰렸다. 1097년 5월 21일에는 술탄 쿨르츠 아르슬란이 직접 이끄는 구원군이 십자군을 공격했지만 레몽 4세의 군대에 패배했으며, 6월 초에는 동로마 제국의 타티키오스와 시칠리아의 보에몽이 성벽에 손상을 입혔다.
6월 17일이 되자 부투미티스는 니케아의 천연 해자로, 도시 한 쪽 성벽에 면한 아스카니오스 호수에서 함대를 조립하여 성을 타격하였다. 그는 룸 술탄국의 배들과 식량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18일이 되자 십자군 영주들은 니케아가 19일 밤을 견디지 못하리라고 예측하고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지속되는 포위 공격속에서 황제는 로마인과 정교회 신자가 시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제국의 유서 깊은 대도시인 니케아가 큰 피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8]. 황제는 타티키오스를 보내 도피해 있던 룸 술탄국의 술탄 쿨르츠 아르슬란과 비밀 회동을 가지고, 니케아에 사는 이슬람 병사들과 주민, 술탄의 왕비[9]의 신변을 보호하는 대신 제국에게 도시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술탄 아르슬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날 밤 자신의 수비병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했고 남은 병력을 규합해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도망하였다. 아스카니오스 호수의 제국군은 야밤을 틈타 수비병이 없는 니케아의 성문을 넘었다. 부투미티스는 즉시 행정을 장악하고 도시의 무슬림들을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들 중에는 술탄의 왕비와 갓 태어난 술탄의 아들도 껴있었다. 포로가 된 이들은 후에 비밀 조약에서 약속된 것과 같이 스미르니로 옮겨져 괜찮은 대접을 받았고, 다시금 룸 술탄국으로 이송되어 가족들과 상봉했다.
6월 19일 아침, 니케아에 동로마의 쌍두 독수리 깃발이 나부끼자, 십자군 영주들은 분노했다. 관습적으로 점령지를 사흘간 약탈할 권리를 빼앗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사흘 약탈한 값어치만큼의 보물을 각각 영주들에게 보냈지만, 그들의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았고,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십자군은 곧바로 안티오히아로 떠나기로 했다. 부투미티스와 타티키오스는 해군의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남아나톨리아를 통해서 이동하자고 주장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각선 직통 방향인 카파도키아와 중부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육군 지휘자 타티키오스는 십자군과 함께하기로 했지만 마누일 부투미티스는 산악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다시금 바타비아와 마르마라 해협으로 돌아왔다. 니케아를 점령한 그는 황제에게 니케아의 총독 둑스[10]로 임명되었다.
5. 킬리키아 원정
킬리키아는 30여년 전부터 셀주크 투르크와 동로마의 지배를 받는 군소 아르메니아 영주들이 난립한 곳이었다. 아직까지 서부 아나톨리아 영토의 무슬림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한 동로마였지만, 부투미티스는 함대를 동원하여 1104년까지 아다니(Adane), 아탈리아(Attaleia), 타르소스(Tarsos) 등의 팜필리아와 킬리키아의 거점들을 점령하였다. 이중 몇몇 곳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 원주민들과 토후들이 세운 소 아르메니아 왕국을 건립하고 독립을 획책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킬리키아 내륙으로 밀려나고 해안 도시들은 동로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지역의 방위를 휘하 장군에게 맡기고 수도로 돌아간다[11]6. 우트르메르로의 외교 활동
[1] 해군 군관구인 에게우 펠라기우의 군관구장이었다.[2] 이 전쟁 이후 콤니노스 왕조 후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루에 걷던 관세는 무려 2만 노미즈마에 달했다. 1달만 관세를 걷으면 웬만한 대규모 원정군의 식량과 무기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제해권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정도의 관세 수입이었다.[3] 이상 내용의 출처는 Alexiad 6권 10-11장이며, 내용 정리와 사실 대조 과정에서 존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 3권과 영문 위키 백과 Manuel Boutoumites, John Doukas, Megas Doux, Seljuk Campaigns in the Aegean 문서를 참조하였습니다.[4] 이 문단의 출처는 알렉시아드 9권 1장입니다.[5] 이상 출처는 알렉시아드 9권 2장입니다.[6] 출처는 알렉시아드 10권 7장 - 9장[7] 니코미디아와 더불어 비티니아 - 옵시키온의 중심지이자 유서 깊은 도시였다.[8] 또 더 중요한 이유로 니케아의 지리적 특성이 있다. 니케아는 비티니아 저지대와 프리지아 고지대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 때문에 니케아가 제국의 향후 소아시아 진공에 있어 요충지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9] 스미르니 토후 차카의 딸이다.[10] 원래 부투미티스가 가지고 있던 해군 총사령관 직위 '둑스'와 이름은 같으나 같은 것은 계급 뿐이고 여기서의 둑스는 지방 행정을 도맡는 지방관을 뜻한다.[11] 출처: 알렉시아드 11권 9장. 부투미티스는 이 시기에 보에몽과 아무런 접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