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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21:38:11

릴리언 블랜드



<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릴리언 블랜드
Lilian Bland
파일:릴리언 블랜드.jpg
본명 릴리언 블랜드
Lilian Bland
출생 1878년 9월 28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켄트 메이드스톤
사망 1971년 5월 11일 (향년 92세)
영국 잉글랜드 콘월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가족 찰스 로프터스 블랜드(배우자)(사촌)
직업 항공 기관사, 언론인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항공 기술자로써2.3. 이후
3. 여담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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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출신의 항공 기관사. 항공기를 설계, 제작, 조종한 세계 최초의 여성이다. 이상하게도 항공 역사 기록에는 그녀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일반 대중에게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릴리언은 1878년 9월 28일 영국 켄트주 메이드스톤 근처 윌링턴 하우스의 영국계 아일랜드인 가정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0년, 20대 초반에 그녀의 아버지의 고향인 벨파스트 근처의 카먼머니로 이사했다. 릴리언은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카먼머니 힐을 자주 거닐며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지켜보고 사진을 찍곤 했다. 그녀는 유럽을 여행했고, 로마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또한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다국어 구사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일은 블랜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당시 많은 에드워드 시대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바지를 입고, 흡연을 하고, 자동차 엔진을 만지작거렸다. 사격, 사냥, 경마와 같이 전통적으로 남성과 관련된 많은 야외 활동을 즐겼으며 그림 그리기와 바느질과 같은 취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기수 면허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었고, 그랜드 내셔널에 출전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지원했지만, 성별 때문에 거부당했다. 1906년 배드민턴 잡지에 '낙하의 기술'이라는 기사를 썼다. 말에서 떨어질때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1]

2.2. 항공 기술자로써

1908년까지 릴리안은 런던 신문의 스포츠 기자 겸 보도 사진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해 여름, 스코틀랜드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릴리안은 대부분의 시간을 하늘을 나는 갈매기를 지켜보고 사진을 찍는 데 보냈고 그 과정에서 비행에 관심이 생겼다. 1909년 여름, 그녀가 30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삼촌 로버트가 프랑스에서 보낸 루이 블레리오의 단엽기와 치수가 적힌 엽서는 그녀의 항공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북돋아주었다.

릴리안은 1909년 블랙풀에서 열린 최초의 공식 항공 회의에 참석하여 전시된 항공기의 크기와 치수를 꼼꼼히 기록했다. 또한 그녀는 비행 중인 비행사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은 바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먼저 돌리며 코너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양한 책과 잡지에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읽었고, 사망한 삼촌의 작업장에서 자신만의 비행기를 설계하고 제작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는 날개폭이 6피트인 복엽 글라이더를 만들어 연처럼 성공적으로 날렸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실물 크기의 글라이더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대나무, 가문비나무, 느릅나무, 재나무를 사용했고, 스코틀랜드의 갈매기를 떠올리며 재나무를 쪄서 구부려 날개 끝의 약간의 곡선을 흉내냈다. 가문비나무는 갈비뼈와 지지대에 사용되었고, 표백되지 않은 옥양목은 젤라틴과 포르말린의 혼합물에 담가 방수 처리했다. 스키드는 재나무로 만들었고, 아웃리거는 대나무로 만들었다.

엔진 받침대는 미국 느릅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위쪽과 아래쪽 날개에 와이어를 연결하여 고정시켰다. 연료 탱크는 섀시 안에 들어 있었고 캔버스 조종석은 조종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네 개의 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조종기는 자전거 핸들 바를 사용했다. 완성된 글라이더의 날개 길이는 20피트 7인치, 무게는 200파운드였다. 릴리언 블랜드는 이를 완전히 독학해서 만들었고 비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릴리언은 의도적으로 '날 수도 있고 날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메이플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이플라이는 카머니 언덕의 경사면에서 엔진을 제거한 후 시험 비행을 했는데, 릴리언은 왕립 아일랜드 경찰청의 키가 6피트인 덩치 큰 4명의 구성원과 조 블래인이라는 어린 소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바람이 메이플라이를 공중으로 들어올리자 5명 모두 메이플라이에 매달려 있었다. 4명의 경찰관은 즉시 놓아주었고, 조는 매달려 글라이더를 다시 땅으로 내려놓았다. 릴리언은 메이플라이가 5명의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면 엔진의 무게도 쉽게 견딜 수 있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릴리언은 맨체스터에 새로 설립된 AV 로어 항공기 회사에 100파운드에 2행정 공랭식 엔진을 주문했다. 주문이 지연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릴리언은 페리를 타고 영국으로 가서 새로운 20마력 엔진과 조정식 피치 프로펠러를 실은 보트 열차를 타고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보트 열차에 동승한 승객들은 크게 놀랐다. 장착 후 엔진 진동으로 인해 볼트가 느슨해지고 스트럿 사이의 와이어가 끊어졌기 때문에 릴리언은 복엽기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로 개조하여 T자형 요크와 삼륜차 랜딩기어를 장착했다. 카머니의 은 첫 비행에 너무 작은탓에 메이플라이는 해체되어 랜달스타운에 있는 오닐 경의 공원으로 옮겨졌다. 엔진이 조종사 뒤에 있었기 때문에, 메이플라이는 앞서 말했던 아이인 조 블레인이 가동했는데, 그는 꼬리 붐 사이에 서서 프로펠러를 휘둘렀다. 처음에는 비행이 순조롭지 않았고, 비행기가 짧은 거리에서 비틀거리며 홉을 했지만, 여러 번 시도한 후 30피트 고도까지 날아올라 4분의 1마일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 릴리언은 믿을 수 없었던 나머지 젖은 풀밭에 있는 바퀴 자국을 계속 확인하며 확실히 이륙했는지 확인했다. [2]

2.3. 이후

릴리언은 이 비행기를 위한 일종의 테이크 홈 키트를 만들어서 판매하고, 그걸로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으나 블랜드의 아버지는 이런 짓에 경악했고, 그녀에게 비행기를 포기하고 자동차를 사라고 설득했다. 이 설득은 너무 효과적이여서 더블린에서 산 새 모델 T 포드에 기뻐한 블랜드는 비행을 바로 때려 치워버리고 메이플라이를 지역 소년 클럽에 기부해버린다. 배달 기사를 설득하여 차를 몰고 곧바로 집에 갈 수 있도록 했고 이후, 1911년에는 그녀는 벨파스트에서 자동차 딜러십을 운영하기까지 한다.

1911년에 사촌 찰스 로프터스 블랜드와 결혼하여 캐나다에 정착하여 황무지에 집을 팠다. 그들은 패트리샤와 재키라는 두 자녀를 두었는데 패트리샤는 불과 16살의 나이에 파상풍 감염으로 사망하고, 상업 어부인 재키는 1962년 밴쿠버 섬에서 보트 사고로 익사했다. 블랜드의 결혼 생활은 패트리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견뎌내지 못했고, 릴리언은 1935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먼저 켄트에서 살다가 1955년에 콘월의 세넨으로 은퇴했다. 그녀는 남은 인생을 도박, 그림 그리기, 원예에 바쳤다.

그녀는 1971년 5월 11일에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랜드 엔드 근처 세넨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3. 여담

4. 참고 문헌


[1] 낙하의 기술[2]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당시 겨우 12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