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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6:27:37

리엄 클랜시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
패디 클랜시 토머스 클랜시 토미 메이컴 리엄 클랜시
리엄 클랜시
Liam Clancy
파일:external/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ob_04.jpg
본명 윌리엄 클랜시(William Clancy)
출생 1935년 9월 2일
아일랜드 카운티 티퍼레리 캐릭 온 수어
사망 2009년 12월 4일 (향년 74세)
데뷔 1956년 1집 앨범 'The Rising of the Moon'
소속 [1]
종교 천주교(세례명: 굴리엘모)
링크 http://www.liamclancy.com/
1. 개요2. 상세3.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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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가수.

토미 메이컴과 함께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토미 메이컴과는 또 다른 분야에서 먼치킨. 토미 메이컴이 예술성 측면에서, 그러니까 좀 심각하고 진지한 쪽으로 먼치킨이라면, 리엄 클랜시는 대중성 측면에서, 그러니까 좀 가볍고 대중적인 쪽으로 먼치킨이다.

간단히 말해 토미 메이컴이 지금 한국에서 활동을 한다면 대중문화 평론가들이나 40대 이상에게서 인기를 얻을 것이고, 리엄 클랜시가 한국에서 활동을 한다면 일반 대중들이나 20대들에게서 인기를 얻을 것이다. 토미 메이컴의 매력이 어디까지나 진지하고 심각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리엄 클랜시의 매력은 특유의 귀요미 외모와 감미롭고 부드러우면서도 맥이 있는 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아이돌 그룹에서 막내가 갖는 이미지를 리엄 클랜시도 그대로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해 귀요미. 그 귀요미 이미지가 젊었을 때만 그런 거라면 상관이 없는데 어떻게 나이가 들수록 귀요미 이미지가 짙어지고 있다!

파일:external/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ob_02.jpg

이 귀요미 이미지에 한몫한 것이 바로 위 사진에 나와 있는 모자. 원래 이 모자는 1970년대 중반부터, 정말 비정상적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탈모를 감추기 위해 사용했는데, 이 모자가 그다지 흔하지 않은 캡 달린 베레모인데다가 특유의 찌그러뜨려서 옆으로 비스듬히 쓰는 스타일 때문에 얼빵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완전히 각인되어 버렸고 바야흐로 귀요미 등극. 그리고 이 모자는 2009년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리엄 클랜시의 아이콘이 된다.

단순히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고, 굉장히 쾌활하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기타 치는 스타일은 완전히 쾌활하고 발랄함 그 자체. 클랜시 형제들 모두가 전반적으로 발랄한 스타일이긴 하지만, 리엄은 특히 그렇다.

리엄의 기질과 스타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귀여운 발랄함이다.

미국 포크의 최고 레전드 가수인 밥 딜런의 절친이기도 하다. 밥 딜런 노래들 가운데 클랜시 브라더스 노래를 패러디한 곡들이 많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밥 딜런 데뷔 30주년 행사 때는 클랜시 브라더스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 밥 딜런의 노래를 불렀다.

2. 상세

1935년 9월 2일 아일랜드 카운티 티퍼레리의 캐릭-온-수어에서 11남매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있는 세 형들(패디, 톰, 보비)과 13살, 11살, 8살차이가 난다. 가정에서부터 이미 귀요미 이미지를 확정한 셈. 그것도 그룹 동료들이 토미 메이컴만 빼면 전부 자기 형들이다.

리엄 클랜시는 가톨릭 교육 사업 단체인 크리스천 브라더스 학교를 나왔으며, 연예계 데뷔를 원래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어렸을 때 약칭은 윌리(Willy)였지만, 이후에 보다 아일랜드적인 이름인 리엄(Liam)으로 바꿨다고.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 계기는 좀 특이한데, 1947년 캐나다로 건너가 온갖 노가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던 두 형, 그러니까 패디와 톰은 1951년 미국으로 넘어와,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이 때는 절대 가수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배우로서.

이 때 패디와 톰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 다이앤 해밀턴(Diane Hamilton)이라는, 뭐라고 직업을 나타내기는 미묘하지만 요즘으로 따지자면 PD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가 있었다. 이 PD는 1955년 아일랜드의 고전 포크송들을 채록하기 위하여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리고 아일랜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부르는 민요들과 바이올린 연주곡들을 녹음기로 녹음해 와서는, 미국에서 패디 클랜시가 사장으로 있던 트래디션 레코드(Tradition Record)를 통해 앨범으로 만들어 발매했다. 제목은 <The Lark in the Morning>. 바로 이 앨범이다.

파일:external/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1955_lark_mono.jpg
그런데 이 '시골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름아닌 패디와 톰의 남동생인 리엄 클랜시와 여동생인 조안 클랜시, 페그 클랜시가 있었고, 또한 리엄 클랜시의 절친이었던 토미 메이컴과 그 어머니 세라 메이컴이 있었다. 졸지에 형들을 제치고 막내가 처음으로 음악계에 데뷔한 셈. 이 앨범은 지금도 구할 수 있고 심지어 다음 뮤직에서 팔기까지 하는데, 막상 들어 보면 그냥 시골 사람들 노래하는 걸 녹음해 놓은 거라 반주도 없고 굉장히 소박하다. 그러나 리엄 클랜시와 토미 메이컴의 데뷔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듯.
그리고 토미 메이컴은 이 해 말에, 그리고 리엄 클랜시는 이듬해인 1956년에, 역시 연기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패디와 톰, 리엄과 토미가 서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미 메이컴이 인쇄소에서 알바를 뛰다가 2톤짜리 철제 프레스에 손이 깔리는 대형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무튼 이 사건 직후, 각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패디, 톰, 리엄, 토미가 의기투합하여 앨범을 하나 녹음을 하여, 패디 클랜시가 운영하는 레이블인 트래디션 레코드를 통해 발매를 하게 되었다. 물론 결코 공식적으로 가수로 데뷔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취미로. 모두 1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통점은 모두 아이리시 레벨 송(Irish rebel song), 즉 아일랜드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는 반영가요라는 것이다.
이 앨범의 제목은 <The Rising of the Moon>.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급조 그 자체여서, 악기 소리라고는 패디 클랜시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만 들린다. 토미 메이컴이 아일랜드 전통 관악기인 틴 휘슬과 드럼을 비롯한 몇 가지 악기를 다룰 수 있지만, 당시 메이컴은 손을 거의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급조한 앨범인데도 엄청나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당시 이 4명은 전혀 음악계에 뛰어들 생각조차 없었고 그냥 재미에 가깝게 만든 앨범이었는데도 이런 흥행을 기록한 것. 1959년까지 3년간 이 4명은 철저하게 연기판에 집중했지만, 1959년 다시 본격적으로 음악판에 뛰어들 시도를 하게 된다.
일단 3년 전에 발매한 급조한 앨범에서 불렀던 곡들을, 이번에는 패디 클랜시의 하모니카는 물론이고 토미 메이컴의 틴 휘슬과 드럼 반주에, 다른 세션맨들의 기타와 하프 반주까지 덧붙여 새로 녹음했다. 이렇게 해서 4명은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 그룹 이름은 '클랜시 형제들과 토미 메이컴'(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 곧 클랜시 브라더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에서 리엄 클랜시 목소리를 들어 보면 문자 그대로 완전 고음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미성 그 자체이다. 김종국 목소리를 생각하면 되겠다. 때문에 코러스 파트에서는 리엄 목소리만 따로 노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 세 멤버들이 음색에는 차이가 있어도 음역대가 대체로 중저음 부근인 데 반해 리엄 목소리는 완전 최고음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 결정적으로 리엄 클랜시 목소리를 묘사하자면... 귀엽다!

리엄 클랜시는 클랜시 브라더스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설명한 귀여운 외모와 감미로운 미성 때문만이 아니라, 리엄이 빠지면 반주가 불가능하기 때문. 곡을 아카펠라로 부르거나 토미 메이컴의 틴 휘슬 가락에만 맞춰 부르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기타 반주는 막내 리엄의 전담이었다. (초기 몇몇 앨범에서 아직 리엄의 기타 연주가 시원찮을 때는 세션을 썼지만,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면서부터 리엄은 기타를 완전히 전담하게 되었다.)

서현을 피아노 셔틀이라 하는데 그것보다 더하다. 소녀시대 공연할 때 서현이 피아노 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클랜시 브라더스 공연할 때는 리엄이 기타를 친다. 그것도 진짜 거의 모든 곡에서. 게다가 형님들은 기타를 칠 줄 모르시고, 절친인 토미 메이컴도 밴조와 틴 휘슬을 다루니, 리엄이 기타 셔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보니 리엄이 메인 보컬인 경우 패디와 톰 모두가 코러스 때까지 멍 때리고 서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패디가 하모니카를 불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1분 42초까지가 <The Nightingale>, 그 다음이 <Johnson's Motor Car>이다. <The Nightingale>의 코러스 아닌 부분에서 패디와 톰은 문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

1969년 토미 메이컴이 그룹을 탈퇴한 이후 셋째형 보비 클랜시가 합류했을 때는 정말 완전 반주셔틀 노릇. 보비도 하모니카만 다루었으니 말이다. 물론 보비도 기타를 칠 수는 있지만 보비는 하지만 1971년 리엄과 대판 싸우고 나서 탈퇴를 선언하고, 그 대타로는 잉글랜드 출신의 루이스 킬런이 들어온다. 이건 뭐 미스에이나 에프엑스도 아니고 다국적 그룹이 된 것.

다행히 루이스 킬런은 밴조와 틴 휘슬은 물론, 소형 아코디언인 콘서티나도 연주할 수 있는 괜찮은 아티스트라 그룹은 다시 활력은 얻게 된다. 루이스 킬런은 예전에도 여러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에 세션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합류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루이스 킬런이 합류하면서 리엄도 콘서티나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저 위에 있는 사진에서 리엄이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콘서티나.

1974년 그룹은 공중분해되었고, 이후 얼마간 리엄은 패닉상태가 되었다.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았지. 그룹은 박살났지, 수입도 마땅히 없지... 이 때 발매한 두 번째(첫 번째 솔로 앨범은 1965년 발매) 솔로 앨범인 <Farewell to Tarwaithie>를 들어 보면 전 곡이 분위기가 암울 그 자체이다. 암담하고 절망적인 리엄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것.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치즈 광고 CM송까지 불렀다.


1974년 TV에 출연한 리엄 클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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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ewell to Tarwaithie> 앨범. 1983년 <The Dutchman>이라는 이름으로 재발매되었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리엄은 결국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고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절친 토미 메이컴이 방송 프로의 MC로 잘 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프로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메이컴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리엄과 메이컴은 듀엣을 결성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리엄은 지옥 같은 암울한 상황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으나 상황은 점차 좋아졌다.

1975년 듀엣을 결성한 리엄과 토미 메이컴은 1976년 첫 번째 듀엣 앨범과 싱글을 발매했다. 그런데 이 싱글이 '''아일랜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토미와 리엄 듀엣은 이후 1977, 1978년에 연속으로 앨범을 내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게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0년대 클랜시 브라더스 인기가 그냥 커피라면 토미와 리엄 듀엣의 인기는 TOP라 할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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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와 리엄 듀엣.


1977년 2월, <Kelly, the Boy from Killane>을 부르고 있는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토미와 리엄 듀엣은 단순히 클랜시 브라더스를 반으로 쪼개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갖추고 있었고, 그 때문에 대박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 토미의 진지하고 심각한 이미지+파워와 쫀득함을 갖춘 중저음과, 리엄의 쾌활하고 귀여운 이미지+부드럽고 감미로우면서도 결코 느끼하지 않은 고음이 서로 대비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이 둘의 만남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 토미와 리엄은 오랫동안 절친이었다. 코드가 안 맞는 것이 이상할 정도. 당연히 듀엣으로 대박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용준형이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작사, 작곡가인 토미의 작품이 클랜시 브라더스 때보다 월등하게 꽃을 피웠다. 실제로 메이컴 자작곡이 거의 대부분의 앨범에 등장한다.
* 클랜시 브라더스 때보다 악기가 다양해졌다. 클랜시 브라더스는 기타, 밴조, 하모니카, 틴 휘슬이 전부였으나 토미와 리엄 듀엣은 바우란(아일랜드식 프레임 드럼)과 콘서티나가 추가되었고 틴 휘슬 같은 경우도 보다 낮은 음역대의 제품까지 추가되면서 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클랜시 브라더스 시절과는 달리 세션 반주자를 다양하게 투입하여 바이올린이나 하프, 부주키 같은 다양한 사운드를 보탤 수 있었으니, 예술성 측면에선 그야말로 먼치킨 등극.
* 그리고 토미와 리엄 모두 드립의 천재가 되었다. 농담이 아니고, 라이브 앨범 들어 보면 드립이 잊을 만하면 나온다. 거의 개그맨 수준.



대놓고 드립, 그것도 섹드립을 시전하는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1983년 2월 공연 영상으로, 마지막 곡을 부르기 전 관객들에게 드립을 시전하고 있다.
리엄: When the warm weather comes back, we are always going to come back, to see the girls in their mini-skirts.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린 언제나 돌아올 거예요.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들을 보러 말이죠.)
토미: Some of the boys in them, too! (그리고 미니스커트 입은 남자들도요!)

아무튼 이렇게 토미와 리엄은 1970년대 후반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를 평정하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거둔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는 1984년 클랜시 브라더스 1기 체제로 잠시 복귀하여, 패디와 톰 클랜시와 함께 리유니언 투어(Reunion Tour)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 리유니언 투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미국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고, 아일랜드 RTE 방송국의 인기 토크쇼인 <The Late Late Show>에도 출연했으며, 심지어 스코틀랜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1985년 말까지 큰 흥행을 거두고, 메이컴과 리엄은 다시 듀엣 활동을 재개했으며 1986년에는 앨범을 발매했다. 이후 2년간 잘 활동하던 이 듀엣은 1988년 서로의 합의 하에 해체된다. 둘 다 40년 이상 절친이었는데 싸웠을 리는 없고, 서로가 솔로 활동에 대한 의지가 있으니 서로 합의하여 해체를 결정한 것.


이후 리엄은 솔로 활동을 재개했는데, 1989년도에는 필 쿨터(Phil Coulter)와 함께 낸 싱글이 차트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둘째형 톰 클랜시가 위암 판정을 받으면서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리엄은 16년 만에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로 복귀하게 된다. 1990년 11월 3일 톰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1991년 봄부터 클랜시 브라더스는 패디, 보비, 리엄과 로비 오코넬 4인 체제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리엄 클랜시가 1990년 솔로 가수로 활동할 때 아일랜드의 올림피아 극장에서 촬영한 콘서트 영상이 1991년에 비디오로 발매가 되었는데(아래 동영상은 해당 비디오에서 발췌한 것), 리엄의 솔로 앨범이 몇 안 되는 관계로 이것도 리엄의 앨범으로 간주한다. 리엄의 대표적인 곡들이 거의 대부분 수록된 걸작품. 심지어 <Loch Tay Boat Song>, <Children after Rain>, <Those were the Days>처럼, 리엄의 오리지널 앨범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컴필레이션 앨범에 끼워진 형태로만 등장하는 곡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1990년, <Red is the Rose>를 부르고 있는 리엄 클랜시.

이들은 아이리시 페스티벌 크루즈(Irish Festival Cruise)라는 행사에 출연하고, 리엄 클랜시의 절친인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행사에 토미 메이컴까지 피처링하여 출연하고, 1995년에는 스튜디오 앨범도 발매하는 등 5년간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그러나 참으로 애석하게도,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의 분배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결국 1996년 봄 마지막 투어를 끝으로, 리엄과 로비 오코넬이 그룹을 탈퇴하면서 그룹은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다.

1996년 여름부터 리엄은 조카 로비 오코넬, 아들 도널 클랜시와 함께 아주 야심차게 3인조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여서, 1997년과 1998년에 연달아 스튜디오 앨범(리엄 클랜시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발표했다. 이로써 리엄은 솔로, 듀엣, 트리오, 콰르텟으로 모두 활동해 본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이 트리오는 잘 나가는 듯 보였으나...

1999년, 세 사람의 거주지가 갈라지게 되었다. 리엄은 아일랜드 워터퍼드, 로비 오코넬은 미국 매사추세츠, 도널은 미국 뉴욕으로. 결국 이 세 사람은 '풀 타임 그룹 활동 중단' 을 선언하게 되고, 세 사람은 각자 흩어져 워터퍼드, 매사추세츠, 뉴욕에서 개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9년 이후 리엄 클랜시는 라이브에 집중하면서 앨범은 컴필레이션 앨범에 새로운 음원 몇 개씩 끼워서 발매하는 정도로 그쳤다. 2002년도에는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종이 책뿐만 아니라 오디오 북으로도 냈고, 여기에는 음원 트랙도 몇 개 끼어 있다. 리엄은 2005, 2006년도에 컴필레이션 앨범을 냈는데, 100% 컴필레이션은 아니고 오리지널 트랙이 몇 개 포함되어 있다. 리엄 클랜시는 2000년에는 홈페이지를, 2006년에는 팟캐스트 채널까지 개설하며 인터넷을 통한 팬들과의 소통을 시작했고, 2006년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은 아일랜드 전역에서 엄청난 히트를 올렸다.

이에 리엄은 워터퍼드에 있는 자기 스튜디오에서 1974년 이후 30여 년 만에 자신의 세 번째 솔로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이 앨범의 특징을 보면 고전 포크송은 2곡뿐이고 대부분이 현대 대중가요들이라는 것. 펑크 록 밴드 포그스(The Pogues) 리더 셰인 맥고원(Shane McGowan)이 원래 클랜시 브라더스를 위해 작곡했으나, 정작 클랜시 브라더스는 한 번도 부르지 못한 <The Broad Majestic Shannon>, 미국 가수 톰 팩스턴의 <The Last Thing on my Mind>, 캐나다 가수 케이트 맥가리글의 <Talk to me of Mendocino>, 아일랜드 가수 폴 브래디의 <Follow on> 등이 레퍼토리에 추가된 이 앨범은 2008년 10월 발매되었다. 제목은 <The Wheels of Life>. 이제는 전설이 된 73세의 할아버지 가수가 지난 52년간의 가수 활동이라는 삶의 바퀴가 굴러온 행적을 돌이켜 본다 뭐 이런 뜻에서 붙어진 제목일 것이다.
이 앨범을 보면 젊은 가수들 피처링한 곡들이 상당히 많다. 1955년생인 메리 블랙(Mary Black)이나 1977년생인 젬마 헤이스(Gemma Hayes) 등 여자 가수들을 피처링한 경우도 있고. 젬마 헤이스가 피처링한 곡을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조용필 앨범에 주니엘이 피처링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The Broad Majestic Shannon>의 원곡에서 'Babe~' (자기야~) 하는 부분을 'Shane'(이 곡을 작곡한 셰인 맥고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으로 바꿔서, 원래 남성 화자가 자기 여친에게 부르는 것으로 설정된 노래를 리엄 클랜시가 셰인 맥고원에게 부르는 것으로 설정을 바꿨다는 것. 아래 유튜브 클립 참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난 토미 메이컴도 죽기 직전까지 공연을 강행했는데, 리엄 클랜시는 아예 앨범을 낼 정도였다. 하지만 리엄 클랜시는 2002년도에 형이 죽었을 때 앓고 있던 병인 '특발성 폐섬유증', 곧 폐 조직이 섬유화되면서 호흡 곤란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아주 무시무시한 병을 앓고 있었다. 실제로 이 앨범을 들어 보면 리엄 특유의 고음은 그대로지만 뭔가 가래가 끓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2009년 초부터 상태가 악화된 리엄은 2009년 5월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무대를 내려오게 되었다.

한편 리엄은 자신의 50년 넘는 가수 커리어를 총정리하는 다큐를 찍고 있었다. 다큐는 2009년 완성되어 아일랜드 영화관에서 개봉되었고, DVD로도 발매되었다. 이로써 배우로써 시작했던 리엄의 연예계 커리어는 배우로써 마무리가 된 셈이다. 그리고 리엄은 2009년 12월 4일, 특발성 폐섬유증으로 코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최종 보스이며 아이돌 같은 존재인 클랜시 브라더스의 막내 리엄의 죽음은 전 아일랜드에 충격을 주었고, RTE 방송국과 각 언론들은 리엄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먼치킨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는데, 유튜브에 올라온 리엄 클랜시 공연 영상에는 엄청난 추모 댓글이 쏟아졌다. 리엄의 장례식은 7일에 다니던 성당에서 치러졌다. 리엄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그 정도로 엄청났던 셈.

리엄의 막내아들 도널 클랜시는 현재 다누(Danu)라는 그룹 멤버이다. 전형적인 귀요미 이미지인 아버지와는 달리 좀 카리스마 있고 터프한 이미지인 듯. 그리고 로비 오코넬, 이파 클랜시(보비 클랜시 딸)와 함께 클랜시 레거시(The Clancy Legacy)라는 이름으로 3인조 활동도 하고 있다. 이 3인조는 쉽게 말하자면 유닛 그룹 같은 것이라 언제나 같이 나오지는 않아서, 다누와 클랜시 레거시 스케줄이 겹치면 로비와 이파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리엄 클랜시는 현대 아일랜드 포크 음악의 시작을 이끈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로써, 문자 그대로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리엄 클랜시가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한 마디로 표현하긴 곤란하지만, 클랜시 브라더스가 소녀시대라면 패디 클랜시는 태연, 톰 클랜시는 써니, 토미 메이컴은 제시카, 리엄 클랜시는 서현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리엄 클랜시의 보컬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고, 기타 치는 스타일도 특이하다. 원래 포크 기타는 스트로크는 피크로 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리엄 클랜시는 스트로크도 손가락으로 친다. 단 엄지 피크는 끼워서. 그런데 이 스트로크를 아주 강력하게 두드려서 손목도 아니고 팔꿈치를 위아래로 흔들며 일렉기타 부럽지 않은 강력한 사운드를 시전한다. 이렇게 강력한 스트로크를 구사하는 스타일의 기타리스트는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그렇게까지는 흔하지 않은데(대부분은 피크로 친다),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진짜 스트로크 한 번 제대로 때리면 기타 줄이 끊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금방이라도 기타 줄을 잘라 먹을 기세. 핑거 피킹은 쓰리 핑거를 주로 쓰는 듯하다.

1970년대 루이스 킬런이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였을 무렵부터 시작한 콘서티나도 빼놓을 수 없다. 위에서 리엄이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콘서티나.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콘서티나를 반주 악기로 쓰는 가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은데, 콘서티나가 음량은 아코디언에 비해 작은 반면 연주하기가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리엄은 그러한 콘서티나를 반주 악기로 사용한다. 몇몇 곡은 리엄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부드럽고 따뜻한 콘서티나 소리가 잘 섞여서 정말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메이컴과 듀엣 활동을 하던 때부터로 추정되는데 바우란도 친다. 자주 치지는 않지만 나름 잘 치는 편.

특이한 것은 콘서티나와 바우란을 연주할 때는 항상 기타를 등 쪽으로 돌려 거꾸로 맨 채 연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콘서티나로 전주를 연주하다가 곡 초반에 반주 없이 (뒤쪽에 있는 반주자들의 반주에만 맞춰) 보컬을 부르는 경우에는 아주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곡 후반으로 가면서 연주하기 위해 콘서티나를 왼손에 들고, 등에는 치지도 않을 기타를 맨 채 마이크에 대고 보컬을 부르게 되는 것. 사실 기타가 별로 무거운 악기는 아니니 뭐 버거울 것은 없지만, 상당히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3. 음반

대부분의 커리어를 그룹 멤버로 보냈기 때문에 솔로 앨범은 많지 않다. 컴필레이션 트랙이 하나도 없는 순수 오리지널 앨범은 아래 볼드체로 처리한 세 가지뿐이다.

* Liam Clancy (1965)
* Farewell To Tarwaithie (1974)- 1983년 The Dutchman으로 이름 바꿔 다른 레이블로 재발매
* Kerrygold Cheddar Cheese (1975년경)-그 문제의 치즈 광고 로고송을 앨범으로 낸 것.
* Home From The Sea (1989)-싱글이다. 아일랜드 차트 3위에 올랐다.
* Irish Troubadour (1999)- 1965년도 솔로 앨범의 익스팬디드 에디션. 녹음되었으나 공개되지 않은 곡들까지 덧붙여서 발매되었다.
* The Mountain of the Women (2002)
* Liam Clancy's Favourites (2005)-컴필레이션인데 일부 오리지널 트랙도 포함한다.
* Yes, Those Were The Days – The Essential Liam Clancy (2006)
* The Wheels of Life (2008)


[1] 아일랜드에는 한국 가수와 같은 소속사 개념이 없다. 레이블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