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47a0> 출생 | 1861년 |
| 경기도 부평도호부 석곶면 백석리 (현재 인천광역시 검단구 시천동) | |
| 사망 | 1909년 2월 24일 (향년 47~48세) |
| 만주 혼춘현 타두거우 | |
| 본관 | 진주 류씨[1] |
| 자 / 호 | 중일(仲日) / 백초(白樵, 白草) |
| 초명 | 류인무(柳寅茂, 柳仁茂) |
| 이명 | 류안무(柳安茂)·류완무(柳完懋)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연해주 일대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암살당했다.2. 생애
경기도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시천리(始川里, 현 인천광역시 검단구 시천동)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다. 이명으로는 한자가 다른 유완무(柳完懋), 유인무(柳寅茂), 유안무(柳安茂) 등이 있다. 「진주유씨파보」에 따르면 1861년생으로 추정된다. 양반 출신으로, 1898년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있던 김구를 탈출시키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고 감옥 폭파 계획을 준비하였다. 그는 청년 13명과 함께 모험대를 조직하여 인천항 주요 지점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김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거사를 사흘 앞두고 1898년 3월 21일 김구가 인천감옥을 탈옥하면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김구가 탈옥에 성공한 후 김창수(金昌洙)라는 이름 대신 김구(金龜)라는 이름과 호를 연하(蓮下), 자를 연상(蓮上)이라고 고쳐주었다.1900년대 초 북간도 지방으로 망명하였다. 서북학회를 비롯한 단체에 가담하여 간도로 이주한 조선 이주민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간도 지역 지리서인 『북여요선(北輿要選)』 서문을 집필하였다. 『북여요선』은 김노규(金魯奎)가 편찬을 주도했는데, 두만강 이북에서 토문강 이남에 걸쳐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의 역사와 지리 등을 바탕으로 간도가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논증하기 위한 책이었다. 『북여요선』 서문에서 밝힌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국경 문제에 관하여 장지연에게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의 오류를 지적하고 정정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1908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신문 발간과 한인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장지연을 초빙하여 『해조신문(海朝新聞)』 주필로 위촉하였다. 또한 대구협성학교 교사 출신인 조창용(趙昌容)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설립된 계동학교(啓東學校) 교사로 부임하게 하였다.
이후 현지 민족운동 세력의 반목으로 『해조신문』의 발행과 계동학교의 운영이 중단되면서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기 위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 계열의 남궁억·유건(柳健) 등과 접촉하였다. 또한 이승희의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돕기 위하여 국내를 왕래하였으며, 이상설과 유인석 등의 망명을 돕기도 하였다.
1908년 1월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학회(漢北學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공립협회(共立協會)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방회를 설립하기 위한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이때 신입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1월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지방회 설립대회에도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이어가던 중, 연해주 지역의 한인 사회가 활동 노선을 두고 갈등을 빚게 되면서, 항일무장투쟁 노선을 주도하던 이범윤 일파에 의해 1909년 2월 24일 암살되었다. 사후 그의 유해는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다만 현재까지 그의 후손이 확인되지 않으면서, 무후선열로서 훈장은 정부가 보관 중에 있다.
[1] 이류계 이판공파 34세 무(茂)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