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썬더 작전 Operation Rolling Thunder | |||
베트남 전쟁의 일부 | |||
B-66기의 레이더 통제 아래 북베트남에서 전략폭격을 하고 있는 F-105 전폭기들, 1966년 6월 14일. | |||
날짜 | |||
1965년 3월 2일 ~ 1968년 11월 2일 | |||
장소 | |||
북베트남 전 지역 | |||
교전국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베트남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중국| ]][[틀:국기| ]][[틀:국기|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틀:깃발| ]][[북베트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윌리엄 모마이어| ]] [[틀:깃발| ]][[틀:깃발| ]][[조지 브라운| ]] [[틀:깃발| ]][[틀:깃발| ]][[응우옌까오끼| ]] | ]][[틀:깃발| ]][[조셉 무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보응우옌잡| ]] [[틀:깃발| ]][[틀:깃발| ]][[풍테따이| ]] (항공전) [[틀:깃발| ]][[틀:깃발| ]][[응우옌반띠엔| ]] (방공전) | ]][[틀:깃발| ]][[호찌민| ]]|
결과 | |||
미국의 전술적, 전략적 목표 달성 실패 | |||
피해규모 | 1,054명 전사, 부상 혹은 포로 항공기 922대 손실 | 사상자 불명 항공기 120대 손실 | |
민간인 사망자 | |||
50,000~180,000명[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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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전쟁의 초기작전들 중 하나. 1965년 3월 2일에 시작되어, 1968년 11월 1일에 끝났다.2. 전개
미군 롤링썬더 작전(이른바 북폭)은 1968년까지 매일같이 베트남민주공화국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고, 다리와 도로 그리고 미국 정보당국이 발견하는 그 모든 산업시설들을 파괴했다. 미 공군은 1965년에는 25,000회의 출격을 수행했고, 1966년에는 79,000번, 1967년에는 10만 8,000번을 수행했다. 프랑스군의 폭격기가 디엔비엔푸 전투 두 달 동안 퍼부은 폭탄은 롤링썬더 작전 당시 미 공군이 당일에 투하한 폭탄의 양과 동등했다. 롤링썬더 작전은 베트남 전쟁의 비대칭적인 전쟁을 의미했다.
Christopher Goscha, Vietnam; A New History, Basic Books, 2016, p.191.
Christopher Goscha, Vietnam; A New History, Basic Books, 2016, p.191.
지상 작전이 아닌 전략 폭격 작전이었다. Americanization(베트남전의 미국화. 즉, 미국의 본격적인 대규모 참전)의 시작이 된 대규모 군사작전이다. 통킹만 사건 직후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주목표는 남베트남 정부의 사기를 진작하고, 북베트남의 수송로를 파괴해서 군수품 보급을 저지하고, 모든 산업기반과 방공망을 무력화시켜서 전쟁수행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확전을 우려해서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도 중국과 소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여러가지 정치적 제한을 두었다. 대표적인게 바로 북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군수품 수송로인 중국과의 국경지대를 '폭격금지구역'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제들이 작전의 실효성을 크게 떨어뜨리면서 결국 롤링썬더 작전은 미국의 완벽한 전략적 패배로 종결되었다. 북베트남군은 중/소 동맹의 지원에 힘입어서 ZU-23, ZPU-4 등의 다양한 대공포와 작게는 스트렐라 맨패즈부터 크게는 SA-2와 같은 지대공 미사일로 구성된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해서 미 공군에 계속 손실을 강요했었고, 결국 미국이 누적되는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작전을 포기한 것이다.
미국이 이 작전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정부의 불안정성 때문이었다.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었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으로의 개입을 최대한 억제하려 노력하였으나, 1965년이 되면 남베트남 정부가 미국의 지원 없이는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통킹만 사건도 북베트남으로의 전략폭격과 본격적인 미국의 개입을 시작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건 직후 '피어스 애로우 작전'라는 이름의 전략폭격작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처음의 폭격작전은 참모본부의 장군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결과를 내놓고 있었고, 새로운 작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그 논의의 결과로 나온 것이 '롤링썬더 작전'였다.
하지만 정작 작전을 시작하자, 문제가 너무 많았다. 첫째는 북베트남의 거미줄같은 방공망이 문제였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하면서 북베트남의 방공망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작전에 돌입하자 베트남 방공망에 격추당하는 기체의 숫자가 미군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누적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은 SEAD임무를 전담하는 와일드 위즐 기체와 슈라이크 대레이더 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방공망 제압에 고심하여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이로는 부족했다.
둘째로 미국과는 다르게 북베트남의 산업시설들은 전국에 흩어져있다는게 문제였다. 한곳이 당해도, 멀리 떨어져있는 다른 공장에서 생산하면 그만인데다가, 정작 공산권의 지원물자는 (폭격금지구역으로 묶인) 베트남-중국 국경지대를 통해서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폭격을 통해 적당히 성과를 올리고나면 정치인들이 나서서 협상 vs 폭격 조건을 내걸면서 잠시 폭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나중엔 북베트남에서도 이러한 미국 정치가들의 태도를 이용하여 폭격이 버거우면 정전협상 테이블에 출석해서 적당히 시간만 끌다가,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나면 파토를 내버리도 했다. 결국 일선에 투입된 미군들은 프레깅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1967년 봄 무렵,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지상전, 공중전 작전들이 총체적 실패에 봉착해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왜냐하면 북베트남을 파괴하되 완전히 패배시키지는 않는 당시 미국의 애매한 외교/전쟁 정책으로는 이 작전의 성공을 바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장군들은 폭격규제 풀어달라고[3] 주장했지만, 정치인들은 중국과 소련한테 개입 명분을 주면 안된다면서[4] "제한구역은 영원히 제한구역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결국 1968년 맥나마라는 대통령과의 의견차이 등으로 사임했고, 클라크 클리포드가 후임 국방장관에 취임했지만, 곧 그도 맥나마라와 같은 의견을 갖게 되었다. 결국 린든 대통령은 구정공세로부터 수개월 후인 1968년 11월 1일, 작전을 중단시키게 된다.
당시 사용되었던 폭탄의 총 양은 86만 4,000톤. 65만 3,000톤을 썼던 6.25 전쟁보다도 많은 양의 탄약이 이 작전 단 하나에 쓰였다. 작전의 목표는 단 한개도 달성하지 못한 채로. 그리고 이 작전에서 미군이 손실한 항공기는 실로 엄청났다. 전투기간의 싸움에서는 미국의 우위가 유지되었지만 지상 공격 도중 대공포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손실이 몇배는 컸던게 원인이다.
3. 기타
이 작전동안 북베트남측에 북한군 조종사들이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실제 참여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롤링썬더 작전 기간동안 14명의 북한군 조종사가 사망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5][6]4. 같이 보기
[1] Tucker 1998, p. 617[2] 베트남 전쟁 민간인 사망자는 200~300만이다. 대부분이 폭격이나 고엽제에 의한 사망자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좌파세계사 p.654[3] 폭격제한구역에 위치한 지대공미사일 기지 때문에 작전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항공전역에서 1차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적 항공 작전능력 기반 파괴' 즉 비행장 등의 기반시설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해지는 결과를 낳았다.[4] 당시는 소련도 핵미사일 개발이 끝난 다음이었고, 미국과 중국, 소련은 전쟁가능지역에 대한 협상을 끝낸 뒤였다.[5] North Korea fought in Vietnam War[6] 실제로 북한군이 베트남전에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군사 고문단 및 병사들을 보낸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