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로렌스 레일리 (Lawrance Reilly) |
생년월일 | 1928년 10월 28일 |
사망년월일 | 2013년 7월 22일 (향년 84세) |
국적 | 스코틀랜드 |
출신지 | 에든버러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0cm | 73kg |
소속팀 | 히버니언 FC (1946-1958) |
국가대표 | 38경기 22골 (1948-1957) |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레일리는 17세였던 1946년, 히버니언 FC의 1군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히버니언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처음 스코티시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을 차지했던 1947-48 시즌까지만 해도 레일리는 확고한 주전으로 분류되지 못했다.레일리는 1948-49 시즌부터 윌리 오몬드의 부상으로 인해 히버니언에서 기회를 잡아갔다. 이 당시 히버니언은 레일리를 포함해 5명의 공격수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페이머스 파이브라 불렸다. 1949-50 시즌에 페이머스 파이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고 히버니언은 1947-48 시즌보다 더 높은 승점을 쌓았음에도 레인저스 FC에 승점 1점차로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히버니언은 다음과 그 다음 시즌에 디비전 1 연속 우승으로 1950년대를 화려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히버니언의 당시 최고 스타는 3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레일리였다.
레일리는 평가전에 자신을 출전시키지 않은 감독과의 마찰로 히버니언을 떠날 뻔한 시기도 있었고 정말로 그는 축구장 밖에 생계 유지 수단을 찾아 일하기도 했다. 이 갈등은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중재로 봉합되었다.
1956년부터 레일리의 출전 횟수는 줄어갔고 1958년에 무릎 부상으로 축구계에서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레일리는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과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을 포함해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총 38경기를 뛰었다.그러나 레일리는 FIFA 월드컵 본선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는데 1950년에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월드컵 출전을 거부해버렸고[2] 1954년에는 레일리의 본선 참가가 거의 확정적이었지만 정작 레일리는 흉막염으로 참가할 수 없었다.
1952년과 1953년에 레일리는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를 상대로 종료 직전에 득점을 올려 패배의 위기에서 스코틀랜드를 구해냈다. 이 활약으로 레일리는 라스트 레일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1954년 월드컵 이후 12월부터 레일리는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연속으로 14경기를 더 뛰며 6골을 넣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레일리는 끊임없이 상대팀의 박스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노리는 밀렵꾼같은 선수였고 그 위에 상당한 레벨의 볼 컨트롤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레일리는 체구는 작지만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점프력이 좋아 많은 헤딩슛을 성공시켰다. 여기에 그는 뛰어난 속도와 빠른 회전 능력을 보유했고 레일리가 넣은 대부분의 골이 근거리에서 나왔지만 모든 각도와 위치에서 양발로 슛을 날릴 수 있었다.4. 수상
4.1. 클럽[3]
- 스코티시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 3회: 1947-48, 1950-51, 1951-52
- 스코티시 풋볼 리그 디비전 1 준우승 3회: 1946-47, 1949-50, 1952-53
- 스코티시컵 준우승 1회: 1946-47
- 스코티시 리그컵 준우승 1회: 1950-51
4.2. 개인
- 스코티시 풋볼 리그 디비전 1 득점왕 3회: 1950-51, 1951-52, 1952-53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스코틀랜드가 속했던 1조는 FIFA의 특혜로 영연방 4개팀끼리 지역 예선을 치러 2위까지 진출권을 줬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밀려 2위를 하게 된다면 월드컵 출전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순위가 자기들이 말한 대로 나오자 월드컵 출전을 진짜로 거부해버렸다.[3] 레일리는 히버니언 FC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