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러스크 書翰Rusk note of 1951
(국역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한 달 전, 대한민국 측에서 조약의 초안을 수정할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해, 1951년 8월 10일 미국 국무부 극동 지역 차관보 딘 러스크(Dean Rusk)[1]가 주미 한국 대사 양유찬에게 보낸 비공개 서한.
2. 문제의 내용
(중략)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竹島) 혹은 리앙쿠르 암(Liancourt Rocks)으로 불리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측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 현(島根 県) 오키(隱岐) 섬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전혀 주장한 적이 없다.(중략)
(ellipsis)As regards the island of Dokdo, otherwise known as Takeshima or Liancourt Rocks, this normally uninhabited rock formation was according to our information never treated as part of Korea and, since about 1905, has been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Oki Islands Branch Office of Shimane Prefecture of Japan. The island does not appear ever before to have been claimed by Korea.(ellipsis)
- 딘 러스크
- 딘 러스크
3.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후 일본의 영토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이 한국에 반환할 도서지역의 목록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는데, 일본 측은 여기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기에 이를 독도에 대한 영유권의 주장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포함한(including)' 항목이고[2], 거기다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상정되어 언급되지 않았다는 해석이 한국측의 주장이었다.4. 독도의 삭제
원래 강화조약의 1947년 3월 초안부터 1949년 2월 초안까지는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가 언급되어 있었다. SCAPIN 제677호에도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접근을 금지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친일 성향이 있었던 미국의 일본국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3]의 주장으로 인해 독도가 빠지게 된다.그 이후, 이승만 정부는 조약 초안의 수정을 요청하였고, 미 국무부는 양유찬 주미 대사에게 독도가 어디있는 섬인고 하고 물었는데, 대사관 직원들은 울릉도 아니면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섬 아닌가요라는 답을 한다.(1951. 8. 3. 국무부 메모) 그 나흘 뒤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국무부 고문이던 존 포스터 덜레스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리학자뿐 아니라 한국대사관에서도 독도와 파랑도의 위치를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 섬에 대한 한국 주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요구를 고려하기 어렵다"(8. 7.)고 한다.
그리고 3일 뒤 러스크 서한이 비밀리에 한국으로 전달된다. 요지는 1905년 이전에 독도가 한국 땅이었다는 근거가 없으니 조약에도 넣어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무주 도서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면 일단 국가의 공식적 문서를 통해 무주 도서를 자국령으로 편입함을 알려야 하고, 이 때 도서의 이름뿐만 아니라 도서 위치를 나타내는 경도, 위도를 표시해야 하는데, 대한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령으로 선포하고 지방관을 파견했지만, 독도의 경도 및 위도를 기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5. 문제점
러스크는 강화회담의 주요 미국 대표도 아니었고, 그의 견해가 미국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말그대로 그냥 '쪽지'일 뿐이다.독도가 일본 영토라 주장하는 일본인들이 비엔나 협약 전문까지 인용해 가면서 국제법에 유효하다고 목숨을 거는 부분이 바로 이 러스크 서한이지만 러스크 서한은 러스크가 한국 정부측에 전달한 비공식 비밀문서였고 이 문서가 다른 연합국측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당시 미국의 입장이 이랬다고 설명하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법에서 언급되는 "비엔나 조약/협약"은 한 두 개가 아닌데, 여기서 말하는 비엔나 조약은 1969년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약자 VCLT)을 말한다. 이 협약에서는 국가 간 조약의 해석 규칙과 같은 행정적인 처리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는데, 일본 측에서는 특히 "국가간 조약은 조약문 자체뿐만 아니라 부속된 문서들까지 조약의 일부로 취급한다"(VCLT 31조 2항 b) 부분을 주로 인용한다. 러스크 서한 역시 조약에 일부 취급해야 한다는 논지를 위해 비엔나 협약이 계속 인용되는 것이다. 당연히 근거가 없다. 비엔나 협약에는 조약의 부수적인 문서가 되려면 조약의 당사자가 이 문서는 조약의 일부라고 수락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전술했다시피 이 문서는 비공개로 일본에 전달조차 되지 않아서 수락하고 싶어도 절대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러스크 서한은 후에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1953. 12. 09.)으로 사실상 무력화(無力化)되었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에 의하면, 러스크 서한은 일본에도 알리지 않았고 또한 러스크서한에 명시된 미국의 입장은 여러 조약서명국들(48개국) 중의 한 나라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러스크서한을 가지고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국제법 전문가인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전문으로 분명히 한 것이다. # ## 요컨대 차관보가 저지른 오류를 그보다 상급자인 장관이 직접 바로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되었든 미국은 미국 정부의 공식 견해도 아닌 개인 견해를 마치 연합국의 합의 사항인양 속여[4] 한국 정부가 독도를 포기할 것을 종용했고 미국의 수작을 간파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미국과 일본의 뒤통수를 때렸는데 그게 바로 평화선이다. 물론 일본은 날뛰었으나 이상하게도 미국은 이를 사실상 방관했는데[5], 실제론 1953년 11월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 내부문서에는 '충돌이 되풀이된다면 우리는 러스크 서한을 공개해 그 내용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조정이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라고 미국도 속으로는 반발한 듯 하지만, 정말 러스크 서한을 공개해 봤자 오히려 자신들의 부정행위[6]만 들통날 뿐이므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러스크의 메모 이후에도 6.25 전쟁의 상황에 따라서 독도의 영유권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로 한국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되자 미리 독도를 일본 땅으로 확정시켜 독도마저 공산권으로 넘어가는 걸 막아야 하는 게 미국의 입장이었지만 몇달 뒤 전선이 안정화되고 한국 정부가 존속할 것이 분명해지자 슬그머니 일본측 주장에서 발을 빼고 있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무렵에는 논란 이전 애초의 상황으로 돌아가 독도는 일본령에서 빠진다는 SCAPIN677 포고령의 입장으로 귀결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서한을 통한 논쟁은 일본이 '독도가 무주지라서 우리가 날름한다.'라고 한 독도편입문서 신뢰성을 따지는 걸로 옮겨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참조. 한편 1904년 9월의 신고호 행동일지, 1904년의 한일의정서, 1900년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1877년의 태정관지령 등등, 그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울릉도에 살면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독도에서 어업을 했다는 걸 당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가 무주지라고 우기려면 한국의 여러 국가들이 남긴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논파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한국전쟁의 전황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와중에 미국의 마음도 오락가락하다가 전선이 안정화되고 한국 정부가 미국 진영 내에 남을 것이 분명해지자, 결국 독도는 한국령으로 남기기로 묵인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이를 확실히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것 때문에 미국이 의도적으로 독도를 한국과 일본 양국이 줄다리기를 하도록 방치했다는 소수의견도 있다. 어느 한 쪽으로 확실하게 명시하지 않고, 미국입장에선 한국땅으로도, 일본땅으로도 해석 가능하게 고의로 모호하게 처리했다는 것.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한국이 공산화 될 걱정을 해야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독도를 일본에 넘기면 반미감정으로 한국이 자유진영에서 이탈해버릴 우려가 있었고, 그렇다고 한국땅으로 명시했다가 한국이 공산화 되어 버리면 차라리 독도가 일본령이어야만 독도를 공산진영을 상대로한 미사일 사이트나 감시레이더라도 설치할 수 있는 최전선 요충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는 특별한 변경사항이 없다면 SCAPIN677에 따른 일본국 영토변경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준거조항(Article 19.(d))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1943년의 카이로 선언 및 이를 이행하기로 규정한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도 위반된다.
여담으로, 일본어 위키백과의 SCAPIN 문서에는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독도를 추가하도록 미 국무성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강화조약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는데 실패한 한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서명 후인 1951년 9월 8일 이후 처음으로 SCAPIN 제677호를 근거로 독도에 대한 영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정부는 SCAPIN 제677호를 주축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SCAPIN 제677호에 기반한 주장에 대하여 1952년 11월 14일에 미 국무성 주한 미국 대사에게 "SCAPIN 제677호는 일본의 영속적 주권 행사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러스크 서한에 관한 정보도 얻은 주한 미대사는, No.187 구술서에 '미국의 입장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한 러스크 서한대로다.'라고 한국 외교부에 답변했다. # |
당연하게도 이 역시 상기한 것처럼 러스크 서한이 효력을 이미 잃은 상황이기에 적절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미국 문서는 원문을 모두 표기했으나 No.187 구술서만은 원문을 표기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 쪽지에 영어로 'Dokdo라고 적어놔서인 모양이다. 또, 이 No.187 구술서에 나오는 미국의 입장 역시 1년 뒤에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1953.12.9)이 나오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6. 관련 문서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 (SCAPIN No 677)
- 신고호 행동일지
- 한일의정서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태정관 지령
-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 세종실록지리지
- 이승만 라인
- 독도
[1] 후일 미국 국무장관까지 지낸다.[2] 즉 "나열"이 아니라 "예시" 조항이라는 말이다. "모든 항목의 나열"과 "예시로 드는 몇몇 항목"은 다른 개념이다.[3] 아내가 일본인이었고 일본인들은 절대 그러지 않는데, 한국인들은 폭력 성향이 있다, 한국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억압에 눌려 불행하고 가난하며 침울해서 후줄근한 민족의 나라라는 발언을 하는등 혐한 성향도 있었다.[4] 러스크 서한은 1951년 몰래 한국에 전달되었는데 1978년에 공개되기 전까지 연합국은 커녕 일본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5] 미국은 평화선 선포 한 달 후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으나 이승만은 무시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미국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6] 미국의 독단행위로서, 전후 일본의 영토를 연합국의 합의로 정하기로 한 포츠담 선언에 위반-호사카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