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랍어 الدلفيين압바스 왕조의 번국으로써, 9세기 이란 서부 (지발)를 다스린 아랍계 왕조. 테헤란 근교인 카라지의 영주이던 둘라프 가문의 알 카심이 약 40여년간 지발의 총독을 역임하며 세습 체제를 확립한 결과 성립되었다. 그 후계자들은 860년대 압바스 조가 내분을 겪는 틈에 독립적인 군주로통치했으며, 손자인 아흐마드는 886년 압바스 조의 동맹으로써 사파르 왕조를 격파하고 잠시나마 이란의 패권을 쥐었다. 하지만 이내 양측 모두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893년 아흐마드가 사망한 후 후계자 분쟁마저 일었다. 이에 재정복에 나선 압바스 조에게 896년 멸망하였다.
2. 배경
둘라프 왕가가 속한 바누 이즐은 이슬람 정복 당시 그 선봉으로써 이라크에 정착한 아랍 부족이었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가문에 속한 이드리스와 이사 형제는 상업에 종사했는데, 압바스 혁명을 도운 혐의로 투옥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혁명의 지휘관 아부 무슬림이 압바스 가문에 의해 매입되어 해방되기 전까지는 이사의 하인 출신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는 후대에 둘라프 측이 정통성 강화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라고도 한다. 압바스 혁명이 성공한 후 석방되어 재차 상업에 종사한 이드리스는 부를 축적하는데 성공하여 하마단 일대에 토지를 매입하고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이사는 더 동쪽의 이스파한에 정착하였고 대상들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내 위험 수당이 큰 도적질을 그만두고 다시 북쪽의 카라지에 정착해 농장을 매입하고 궁전과 성채를 지었다. 이렇듯 800년 무렵 둘라프 가문은 카라지를 사실상 지배하였다.3. 아부 둘라프 알 카심
이사의 아들 아부 둘라프 알 카심은 그의 문학적 능력을 선호한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시아파 신도[1]였음에도 지발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알 카심은 카라즈를 침공한 베두인들과 쿠르드 등의 유목 민족들을 격퇴하고 일대에 악명을 떨쳤던 도적단을 사로잡았다. 하룬의 사후 벌어진 4차 피트나 (내전)에서 알 카심은 바그다드의 알 아민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바그다드가 포위되며 전세가 기울자 그는 카라즈로 돌아갔고, 중립으로 남기로 하였다. 다만 알 아민의 생전에는 알 마문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았고, 전자를 죽인 알 마문은 알 카심을 용서하고 지발의 총독으로 유임시켰다. 이후 그는 알 무타심, 알 와시크의 치세동안 총독을 맡으며 다일람 인들을 격퇴하고 서쪽의 카즈빈, 남쪽의 이스파한 등을 접수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동시에 830년대 압바스 장군 아프신의 호람딘 토벌에 참가하는 등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다.특히 알 무타심과 그는 술벗으로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호람딘 토벌 후 알 카심은 다마스쿠스 총독위를 하사받았는데, 그를 시기한 아프신이 암살 음모를 꾸몄지만 카디 이븐 아비 다우드의 경고 덕에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메카 순례를 다녀온 후 바그다드에서 호라산 출신 샤리프들이 지키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유언으로 알 카심은 고향 카라지에 금화 2천닢을 기증하였다. 알 카심의 동생 마킬 역시 압바스 궁정의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시인으로도 활동하였다. 한편 그의 장장 40년에 이르는 임기는 지발에 대한 둘라프 가문의 입지를 굳건히 마련하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둘라프 가문은 자체 동전 주조권을 지니는 등 칼리파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인 세습 통치를 이어나갔다. 매년 바그다드에 바치는 연공만이 번국임을 나타내었다. 알 카심의 사후 그의 장남 압둘 아지즈가 계승하였고, 차남 히샴은 압바스 조의 장군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