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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8년 |
함경남도 명천군 아간면# | |
사망 | 1943년 4월 (N세)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 | |
묘소 | 강원도 양구군 남면 대암산 자락 |
본관 | 광천 동씨# |
가족 | 가족관계 |
학력 | 학교명 (졸업 여부)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동창률은 1868년경에 출생했다. 대동단사건 당시 그의 신문조서에는 본적지가 경성부 입정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 출생지는 함경남도 명천군 아간면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874년경에 서울로 상경하여 흥인지문 밖의 김노수(金魯洙)의 집에서 묵으며 줄곧 농사를 도왔다. 그후 1904년 10월 일진회에 가입하여 1905년 4월까지 평의원과 경무위원장(警務委員長)을 지내며 친일 행적을 보였지만, 한일병합 후 회심하여 국권 회복의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전협, 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동창률은 가입 후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의 배포에 앞장섰고, 1919년 8월 함경북도 단천에 파견되어 김병권(金秉權) 등을 동지로 포섭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는 계획에 참여했지만 의친왕 일행이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일본 순경에게 체포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대동단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대다수 조직원들이 체포되었고, 그 역시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로 거처를 옮긴 동창률은 이곳에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1943년 4월경 병사했고, 강원도 양구군 남면 대암산 자락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동창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