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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4:48:46

데이비드 존슨

잉글랜드의 축구인
파일:0_Roger-Hunt-funeral.jpg
데이비드 존슨
David Johnson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데이비드 에드워드 존슨
David Edward Johnson
출생 1951년 10월 23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리버풀
사망 2022년 11월 23일 (향년 71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유스 에버턴 FC (1967~1969)
프로 에버턴 FC (1969~1972)
입스위치 타운 FC (1972~1976)
리버풀 FC (1976~1982)
에버턴 FC (1982~1984)
반즐리 FC (1984 / 임대)
맨체스터 시티 FC (1984)
털사 러프넥스 FC (1984)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84~1985)
배로 AFC (1985~1986)
감독 배로 AFC (1985~1986 / 선수 겸 감독)
국가대표 8경기 6골 (잉글랜드 / 1975~1980)

1. 개요2. 클럽 경력3. 은퇴 이후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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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축구인.
밥 페이즐리의 '붉은제국' 리버풀 FC의 일원이었으나 선임인 존 토샥, 후임인 이안 러시의 명성에 가려진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2. 클럽 경력

파일:0_David-Johnson-Liverpool-1977.jpg

리버풀 태생의 존슨은 온 가족이 콥이었던 가정에서 자랐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프로데뷔한 팀은 리버풀의 지역라이벌 팀인 에버튼 FC였다.
에버튼, 입스위치에서 시즌 두자릿 수골을 기록한 존슨은 리버풀 입단 이전에도 잉글랜드 국가대표 데뷔를 이루어낸 유망주였고 리버풀의 레전드 감독 빌 샹클리는 여러차례 그의 영입을 원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존슨이 리버풀로 입단했을 때는 이미 빌 샹클리 감독이 물러나고 밥 페이즐리가 부임한 이후였다. 페이즐리는 존슨을 케빈 키건의 파트너였던 리버풀의 주전 스트라이커 존 토샥의 장기적인 대체자로 여겼다.
존슨은 첫시즌 로테이션 선수로 활약했고 묀헨 글라드바흐를 상대로 한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두번째 시즌 역시 시즌 막판 부상을 당하며 2번 연속 유로피언컵 결승전 출전기회를 놓쳤다.

존슨이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발돋움한 것은 3번째 시즌인 78/79시즌으로, 해당시즌 유로피언컵에서는 첫상대인 노팅엄 상대로 충격적인 탈락을 당했지만 존슨을 비롯한 선수들의 활약으로 풋볼리그에서는 우승을 해냈다.
해당시즌 존슨은 리그서 30경기 출전해 16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다음시즌인 79/80시즌에도 역시 유로피언컵에서는 1라운드만에 탈락했으나, 리그서는 37경기 출전해 21골을 넣으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고 팀의 리그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때의 활약 덕에 존슨은 리버풀 입단 이후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승선했고, 신성 마라도나가 활약하던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멀티골을 박아넣으며 주목을 받아 이후 80유로 대표팀에 까지 승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예 이안 러시가 리버풀에 입단하며 존슨은 러시와 주전경쟁을 하게 되었고, 80/81시즌 3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출전하여 레알 마드리드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빅이어를 들어올렸으나 이것이 존슨의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영광이었다.

러시가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존슨은 결국 안필드를 떠나기를 결정했고, 그의 행선지는 다름 아닌 본인의 첫 프로데뷔 구단이자 리버풀의 지역라이벌 에버튼이었다.

이후 에버튼, 맨체스터 시티 등에서 활약한 존슨이었지만 리버풀에서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1986년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2022년 11월 23일, 71세의 나이로 인후함으로 인해 사망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