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시작은 0분 30초, 1차 폭발은 1분 10초, 2차 폭발은 2분 17초[1]
Vuurwerkramp in Enschede
1. 개요
2000년 5월 14일 네덜란드 엔스헤데에서 발생한 폭죽 폭발사고로 이 사고로 23명이 숨졌다.2. 과거
네덜란드는 폭죽 사용량이 유럽에서도 유래없을 정도로 많은 관계로 항상 많은 양의 폭죽을 비축해두고 있다.S.E 회사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은 폭죽을 소유한 회사로 엔스헤데 한복판에 창고를 두고 있었다. 회사는 중국에서 폭죽을 수입한 뒤 마이클 잭슨, 본 조비 같은 유명 가수 콘서트나 각종 축제현장에 판매하곤 했다. 1977년에 이 창고가 건설될 때는 주변은 그저 허허벌판이었으나 이후 주택가가 건설되면서 주택가 주변에 둘려싸였다. 창고도 가만히 있기만 한건 아니었고 계속해서 량을 늘리면서 창고만으론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임시방편으로 컨테이너에 넣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18톤을 보관 가능한 창고만 있었으나, 점차 늘어나면서 159톤을 넣을 수 있는 창고가 됐다. 또한 폭죽의 위험성을 1.4에서 1.1로 분류하면서, 1.1에 갈수록 위험한 것으로 구분했는데, 원래 이 창고에는 1.4 폭죽 136톤, 1.3 폭죽 2톤을 보관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1.4 폭죽은 고작 16톤 밖에 안됐고, 1.3 폭죽이 153톤, 1.2 폭죽이 5톤, 1.1 폭죽이 1.6톤 있었다. 거기다 컨테이너를 너무 가까이 붙여놔서, 한 곳에서 불이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붙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큰 사고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전 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 중에는 주택 주변에 폭죽창고가 있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엔스헤데의 창고는 벙커 13개가 있는 메인 건물이 있고 그 주변을 16개의 강철 컨테이너, 7개의 콘크리트 벙커가 둘러싸는 형태였고, 그 외에 하역장이 2곳 있었다. 이 컨테이너와 벙커 안에 수만개의 폭죽들을 보관했다. 문제는 이 창고안의 폭죽들이 중국제답게 정상적이지 않았고, 폭발력도 장난 아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폭죽이 있는 컨테이너를 그냥 열어두거나, 위험하게 쌓아두는 등 안전불감증을 보였다. 이 상태에서 사고 1주일 전, 회사 내에서 자체적으로 안전점검을 한 결과 기준에 적합하다고 판결이 났지만...
3. 폭발
2000년 5월 14일 15시 3분, 정체불명의 화재가 폭죽 900kg이 저장되어 있던 메인 건물에서 발생했다. 처음엔 주민들은 연기가 조금 난다고만 생각해 구경하러 왔고, 폭죽창고가 있단 사실조차 몰라서 다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방관들이 출동해 3명은 벙커에서, 1명은 컨테이너에서 화재를 진압했지만 불이 폭죽을 가득 실었던 E2 컨테이너에 옮겨붙었고, 불을 못 견딘 폭죽들이 폭발했다. E2 컨테이너가 폭발하면서 높이 85m의 버섯구름이 올라왔고, 400m 반경의 건물 유리창과 지붕널을 날려버렸고, 파편에 맞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당시 폭발의 위력은 TNT 800kg 규모였다. 폭발의 영향으로 일대 기압이 0.5기압 낮아졌다. 폭발로 불이 암모니아 8.6톤이 있던 흐롤슈 맥주 양조장에 옮겨붙어 자칫 잘못하면 유독성 암모니아가 새어나올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이후 불은 폭죽 177톤이 있던 컨테이너에 옮겨붙으면서 폭발했다. 당시 폭발은 TNT로 환산시 약 45톤 정도의 폭발이었으며,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에서 있었던 폭발보다 훨씬 강력했다. 폭발로 135m 높이의 버섯구름이 생겼다. 폭발의 충격이 너무 강해 근처에서 촬영중이던 카메라맨 Danny De Vries(위 영상의 촬영자)가 들고있던 카메라의 렌즈가 어긋날 정도였고, 56km 밖에서도 폭발음이 들릴 정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폭발중 가장 강력한 폭발이었다.
40km 밖에서도 연기가 보이고, 시 당국은 비상대책본부를 구성하고 역내 모든 병원과 소방서에 동원령을 내렸다. 베아트릭스 여왕과 빔 콕 총리가 사고 현장을 찾아 소방관과 구조대들을 독려하고, 가까운 독일의 소방서도 화재 진압을 도우러 왔다. 공군도 와서 구조를 도왔다. 그 결과 불을 간신히 진압할수 있었고, 양조장의 불도 암모니아가 새어나오기 이전에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사망자는 총 23명으로 그중 4명이 불길을 진압하던 소방관이었다. 또한 6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1,400여채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피해를 입었으며, 1,25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1차 폭발 이후 2차 폭발이 있기까지 시간이 어느정도 있었고, 1차 폭발때 겁을 먹은 사람들이 도망가면서 그나마 피해가 줄어들었다. 재산피해는 4억8600만달러에 달했다.
4. 사고 조사
조사를 시작하긴 했으나 폭발이 너무 강해서 남은게 거의 대부분 소실되어서 조사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다.초반엔 그당시 날씨가 너무 좋아서 창으로 들어온 햇빛으로 인해 폭죽이 자연발화했다는 설이 나왔으나 실험결과 아니었고, 당시 S.E에서는 직원들에게 폭죽 교육을 시켰는데 젖은 폭죽을 히터로 말리게 했고, 이때 히터가 불을 붙였다는 설도 나오고 방화로 인한 화재라는 설도 나왔으나 증거는 잡히지 않았다. 그 외에 전기누전 등 많은 가설이 나왔다.
그러던중 안드레 데브리스라는 남성이 자기 차에 불을 지른 혐의로 체포됐고, 경찰은 폭죽공장 화재 당시 뭘하고 있었는지 데브리스에게 묻고 알리바이를 들었으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그의 옷에서 화약성분이 다량 검출되었는데 이건 그 당시 폭죽공장에서 사망한 사람의 몸에서 검출된 것과 거의 동일한 양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폭죽공장에 불을 질러서 이렇게 됐거나 아님 평상시에 로켓을 타고 다녔거나(...) 둘중 하나였다. 당연히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고, 이후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 옷이 그 당시 입은 것인지 아님 다른때 입은건지 불명확하단 이유로 이후 무죄처리됐다.
화재당시 폭발이 너무 강해서 사실 폭죽창고가 아니라 무기창고였다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으나 조사 결과 무기에 쓰이는 화약성분은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다.
5. 사고 이후
화재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총 8,500만 유로의 배상금이 전해졌다.사고 이후 화재현장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었다.
비록 창고가 먼저 지어지고 주거지역이 생긴것이긴 하나, 주거지역 가까이에 폭발물 창고가 있어선 안된다는 법률이 정해져서 주거지역에서 최소 800미터는 떨어져서 지어지도록 정해졌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상당수의 폭죽창고들이 옮겨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