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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0:52:55

남수단 내전

남수단 내전
South Sudanese Civil War
전황 지도
파일:남수단 내전 전황.svg
기간
2013년 12월 15일 ~ 2020년 2월 22일
장소
남수단 전역
교전 국가 및 세력

[[남수단|]][[틀:국기|]][[틀:국기|]]

[[우간다|]][[틀:국기|]][[틀:국기|]]
파일:남수단해방운동 깃발.svg
남수단해방운동
파일:수단혁명전선 깃발.svg
수단혁명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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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단인민해방운동
[[유엔 평화유지군|
파일:UN기.svg
]]UNM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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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파일:르완다 국기.svg
]] 르완다

[[에티오피아|]][[틀:국기|]][[틀:국기|]]
파일:누에르 백군기.svg
누에르 백군
지원 국가 및 세력

[[수단 공화국|
수단 공화국
수단
]][[틀:국기|]][[틀:국기|
속령
수단
]]
지휘관
파일:남수단 국기.svg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1. 개요2. 배경3. 종전4. 피해
4.1. 전쟁 중4.2. 종전 이후

[clearfix]

1. 개요

남수단에서 발생한 내전이다.

2011년 수단에서 독립을 쟁취한 남수단에는 키르 대통령에 충성하는 정부군과 리에크 마차르 전 부통령을 따르는 반군 사이에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이것이 2013년에 키르 대통령이 속한 딩카족과 마차르 부통령이 속한 누에르족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2. 배경

2011년 2월 17일에는 남수단 용레이 지역에 반군이 여러 마을을 무작정 공격하여 211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다. 이 반군 세력을 이끄는 것도 기독교인 조지 아서(또는 아투르, 아르투르) 대령이라고 한다. 이전부터 수단의 지원을 받아 강력하게 무장하고 제법 세력을 강력하게 이끌던 그는 용레이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가 선거에서 지자 휘하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2월 25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남수단 임시정부군이 파병되었으나, 용레이 인근의 히자두 지역의 군벌을 이끄는 리처드 아시킴가 준장이 정부군의 통과를 거부했다. 정부군을 이끄는 가브리엘 마얌바 대령이 아시킴가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그냥 넘어갔다. 결국 여전히 조지 아서는 무사했다.

4월 20일에 반군과 정부군의 충돌로 군 20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미 2011년 4월까지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나마 12월 20일에 조지 아서는 정부군에게 휘하 부대가 진압되면서 사살당했다. 하지만 다른 군벌 세력도 남아있는 남수단에서 여전히 군벌과 내전은 뺄 수 없는 위험이다.

2013년 12월 전 부통령을 중심으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 아직도 교전이 벌어져 수도 주바에 400여 구의 시신이 실려왔다고 한다. #

3. 종전

2015년 8월 정부군과 반군은 전투를 벌인 지 20개월 만에 평화협정에 서명했지만, 아직도 충돌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 2월에 정부군과 반군 양측 간의 연합 정부를 구성한다고 했다. # 그리고 2020년 2월 22일을 기해 반군의 지도자가 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드디어 내전이 끝났다.[1]#

4. 피해

4.1. 전쟁 중

국제연합(UN) 통계에 따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전으로 사망했으며,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남수단을 떠났으며, 남수단은 수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무지막지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12월 15일 딩카족으로 이뤄진 정부군과 누에르족으로 구성된 반군이 소규모로 접전을 벌이다 내전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대통령과 부통령 사이의 긴장이 이들의 충돌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남수단에 내전이 발발하고 몇 시간만에 정부를 지지하는 병력이 주바를 장악하면서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35세였던 모니카의 남편은 그녀 앞에서 총을 맞고 죽었고 자신은 강간을 당했는데, 그녀는 이 때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군인들은 문을 발로 차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총대로 나를 때리고 누우라고 명령했어요. 남편에게는 총에 대해 물었지만 남편은 총도 없었어요. 우리가 어떤 부족인지 물어보고 나를 돌아가며 강간했습니다. 몇 명이나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 다음엔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
심지어 저 여자는 강간을 당했을 때 임신 5개월째였다. 성폭행을 당하고 3달 후에 그녀는 아이를 잃었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온갖 종류의 학살과 고문을 비롯한 전쟁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반군들은 잔혹해서 남자아이는 거세를 하여 피를 흘려 죽게 했고, 여자아이들은 집단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죽이는 방법도 잔인하여 묶인 채로 참수당하고, 불타는 건물에 던져 죽임을 당한 아이들도 있었으며, 어린아이 앞에서 그의 가족들을 무참하게 강간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짓거리를 반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부군도 한다는 것이다. UN남수단임무수행단은 2015년 6월 29일자 긴급보고서를 통해 정부군과 정부군을 지원하는 민병대원들이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들을 집단 성폭행한 뒤 현지인들의 오두막집인 투쿨수에 가두고 불태워 죽인 사건이 최소한 9건 이상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3살밖에 안 된 딸 앞에서 성폭행을 자행하고, 젖을 먹이던 여성으로부터 아이를 떼어내 내동댕이 치고 집단 강간하는 등의 미친 짓이 저질러진다고 한다. 또 반군의 소재를 추궁하고, 가축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아내 약탈하기 위해 벌겋게 불에 타는 석탄을 여성의 손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강제로 쥐게 하고 고문까지 저질렀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러한 막장 짓거리에 남수단인들은 살기 위해 도망을 가게 되었다. 이에 무려 100만 명 정도의 남수단인들이 이웃나라로 빠져나갔으며, 심지어 일부는 자신들을 학살했던 수단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이 간 나라가 모국과 다를 게 없는 막장 국가들이다 보니 차별을 받고 살며 그곳의 반군에게 살해되거나, 어린아이들은 소년병으로 징집 또는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른바 남수단 난민 캠프로 이동하여 살아가는데, 이곳의 사정 또한 영 좋지 않다. 만약 남수단에 폭우가 내리면 구호물자 운반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매일 한 그릇밖에 안 되는 옥수수죽밖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남수단 난민 캠프의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또한 유엔군이 주둔하는 지역에 마련된 캠프에서도 사람들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할 것이 없다 보니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여자들을 강간하거나 폭행하는 막장 짓거리가 저질러진다고 한다.
"주로 야간에 여성을 대상으로 폭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밤에 목욕을 하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남자들에게 폭행당하고 있고,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술을 마시며 보냅니다. 술 또는 다른 마약들을 남용했을 때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학대하고, 소녀들은 해가 지고 나면 끊임없이 남자들을 피해서 도망다녀야 합니다. 이곳에서 하루만 머물러도 밤에 비명과 소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남수단 내전 당시 간호사로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인 벤티우 인근 유엔보호구역에서도 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있는 곳에서도 하루도 빠짐 없이 총격전이 벌어졌고, 폭격을 피해 셀 수 없이 벙커로 피신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그녀가 일했던 유엔보호구역은 우기가 되면 늪지대로 변해버리는 곳에 있었는데, 전쟁을 피해 보호 구역으로 들어온 수천 명의 난민들 사이에는 호흡기 질환과 피부병이 흔했고, 말라리아홍역 같은 전염병부터 처음 보는 풍토병까지 창궐했으며, 아이들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릴 정도로 가히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 간호사는 "전쟁터에서는 총상 환자를 주로 돌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총상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총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도로가 막혀 병원에 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환자들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거나, 살아나더라도 평생 감염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게 된다. 특히 유엔이 지키는 보호구역 밖의 보건의료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 남수단 전역에서 그나마 제 역할을 하던 의료기관 대부분은 문을 닫거나 파괴됐다. "벤티우 시내로 이동진료를 나가 보니 현대적 시설을 자랑하던 병원은 완전히 파괴돼 있었고, 며칠을 걸어와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증언했다. 기사.

현재도 상황은 개막장이라서 남수단 내전에서 식인 등 잔혹 행위가 발견되기도 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남수단 정부군에 의해서 누에르족 남성 수백 명은 한 곳에 모여 총살당했으며, 정부군은 누에르족 사람들에게 모닥불 안으로 뛰어들게 하거나 사람 생살을 먹도록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보고서는 "정부군은 조직적으로 학살을 저질렀다"며 "주바 시내 도처에 검문소를 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색을 벌였다"고 밝혔다. 또 "(정부군이) 누에르족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생살을 먹게 하고, 같은 족 사람들의 피를 마시게 했다"며 "어떤 여성은 '남수단 정부군이 시신을 불에 태우고 그것을 먹으라고 시켰다'고 증언하기도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누에르 족 군인들끼리 모여 군벌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아가 이게 타지에 족이라든지, 누사르 족이라든지 다른 소수 부족들도 "자기들도 딩카놈들에게 저런 꼴이 될 것"이라고 불안해하며 군벌화가 이뤄지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군벌들은 목적이 뭘 하는 게 아니라 정부 못 믿으니까 자기들 스스로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어서 무장해제를 요구해도 듣지를 않으며,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군대의 특성상 비생산적 조직이므로 구성원을 먹여살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하거나 조직범죄 등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아프리카 부족 내전이 계속 질질 끌고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렇게 전혀 의도하지 않은,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저지른 상호 약탈과 학살이 수십년을 이어가면서 원한이 쌓일대로 쌓이기 때문이다. 즉 남수단 정부가 특정 부족에 의존하지 않는 확실한 국민정부가 되어 각 부족을 무장해제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데, 일단 지금 대통령과 부통령 둘 다 그걸 할 수 없는 인물들임이 이미 입증된 상태.

이렇다 보니 수단 언론에서도 비웃는다. 마치 우리가 전쟁범죄를 모두 한다는 투로 하더니만 우리랑 떨어지니까 본격적으로 자기들끼리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어렵사리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가 인터뷰하던 남수단인들은 "독립하면 나을 줄 알았더니만 오히려 수단이던 시절보다 더 엉망이 되었어요! 수단이랑 싸울 때 공통의 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서로 부족끼리 적이니 적만 늘어났어요!" 라고 분노와 슬픔을 담아 절규했다.

4.2. 종전 이후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독일의 도이체 벨레(DW) 방송 등은 남수단 내전 발발 2주년인 2015년 12월 15일 남수단 내전 당시에 자행되던 무자비한 고문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며, 무자비한 인권 유린과 성범죄, 살인, 폭력이 만연해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인육을 강제로 먹이는 등의 잔혹 행위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으며, 10대의 어린 소년들마저 내전에 끌어들이는 현실이다. 국제 의료구호단체인 국경 없는 의사회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유엔의 역할 부족을 비판할 정도로 막장인 상황이다. 간단히 말하면 남수단은 현재 소말리아와 동급인 지상 최고의 생지옥이라고 볼 수 있다.[2]

2016년 7월 9일 독립 5주년 기념일 전날인 8일에는 위에 서술한 대로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 휘하 경호대까지 수도에서 서로 총질을 하고 있으며, 각 지역은 내전과 치안 문제로 엉망이 되고 있다. 외신 추정으로는 3년 동안 내전으로 4~5만 명이 죽고 난민도 해도 200~500만 명 추정인 상황이다.

덤으로 남수단의 전쟁 범죄 처벌은 라이베리아 이상으로 미진하다.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대통령이 정부군은 물론이고[3] 반정부 단체들의 전쟁범죄를 처벌하려는 노력을 일절 하지 않기에[4] 남수단에서의 전쟁범죄가 처음으로 기소된 것조차 2018년 9월에 군사법원에서 2016년 7월에 테라인 호텔에서 기자 1명을 살해하고 국제 구호원들을 강간한 정부군 병사 10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례가 처음이고, 이조차 국민에게 사법 정의를 보장하려는 외국 정부의 압박 때문에 진행된 것이었다.

2014년 1월 24일에 키르 대통령은 2013년 12월에 주바 지역 충돌 당시 발생했던 인권침해와 폭력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보고서를 만들었지만, 이 보고서는 단 한 번도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고, 오히려 키르 대통령은 2015년 2월 24일에 사건 당시 중대한 인권침해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모든 군인에게 무조건적 사면을 제공했다. 그리고 2016년 2월에는 정부군 병사들이 말라칼의 유엔 민간인 보호구역에 난입해 국내실향민들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는데도[5]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이 구성한 또 다른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는 정부군의 폭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사건 당시 자행된 살해 등의 범죄에 대해 책임자 개인에 대한 책임 조치를 권고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국제법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유엔 제재를 받은 정부측 인물이 군에서 승진하거나 여당의 요직을 제공받는 경우도 다수 확인되었다고 한다. #


[1] 물론 공식적으로 이고, 다시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2] 어떻게 보면 북수단과 한나라였던 시절이 리즈시절 일 수도 있다(...).[3] 남수단 정부는 정부군이 중대한 인권침해에 관여했다는 보고를 계속 부인해오고 있다.[4] 남수단 대통령은 군사법원의 판결을 확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독립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사법 절차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삼권분립을 침해하고 있다.[5] 최소 29명 이상이 살해되고 14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피난처 1,251개가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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