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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20:45

김학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고려인 출신 북한의 군인, 외교관.

2. 생애

러시아 연해주에서 김 바실리 이바노비치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장학봉은 그가 1913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억했지만, 실제로는 1917년 11월 18일 생이다. 또한 북한에선 그의 고향을 함경북도 라선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3살 때 어머니를 잃고 9살 때 아버지를 잃어 천애고아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으며 1938년 알마티의 키로프 카자흐스탄 국립종합대학 법학부에 진학, 1941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크즐오르다시 검찰소 예심원으로 배치되어 일하다가 1946년 9월 1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김학인을 1946년 9월 10일, 36명의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북한으로 파견하였다. 11월 8일, 함흥역에 기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북한은 이때 김일성이 북한에서 처음 맞는 생일상을 차려주었다고 이빨을 까고 있다.

이후 보안간부훈련대대부 검찰소장에 임명되는 등 조선인민군 창건에 참여하였다. 북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 창설 이후 검찰소장에 유임되었고, 1948년 9월, 북한 내각이 수립된 후에는 소장 계급을 달고 내무성 검찰국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에 참전했고 중앙경위련대장으로 김일성의 호위를 맡았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경위련대장 근무 시절에 매우 열성적으로 일하여 김일성의 막사 근처에 떨어진 폭탄을 직접 주워서 처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경력이 나중에 복권되어서 좋은 대접을 받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개성에서 열린 정전회담에 참석했다. 이때 국군 및 유엔군 연락장교들과 계속 일했던 경험을 살려 외교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1957년 5월 9일, 박일영의 뒤를 이어 불가리아 대사에 임명되었다. 박일영은 박길룡의 뒤를 이어 동독 대사로 이임했다. 1958년 12월 2일, 림춘추에게 불가리아 대사 자리를 물려준 다음에 허빈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사로 임명되었다. 1959년 1월에 신임장을 봉정, 1959년 4월, 최용건의 폴란드 방문을 수행하였다. 1962년 11월 21일, 리덕현에게 폴란드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소환되었다.

장학봉은 그가 고려인 탄압 때문에 소련으로 돌아가 1973년에 은퇴한 이후 연금을 받으며 살았다고 적었지만 사실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도 그가 발전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위해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공부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인민경제대학에서 공부했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숙청당한 것을 돌려서 표현하는 말이다.(...) 물론 김일성과의 친분을 고려하면 정말로 그냥 당학교에서 공부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한동안 두문불출하다가 60년대 말에 재정성 부상으로 사업하는 것이 로동신문에서 확인되며,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 채택 이후 정무원 재정부 부부장에 유임되었고 1987년 11월, 김일성이 칠순 생일상을 내려주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고,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을 지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말년에 병으로 고생할 때 김정일이 편의를 봐주었다 카더라.

재정부 부부장으로 재직하던 중인 1993년 9월 2일에 불치병으로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부고는 따로 발표되지 않았으나 김일성이 애도를 표시하며 화환을 보내주었다. 1994년 6월 3일, 로동신문은 김학인을 추모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김정은 시대에 그의 소개편집물도 제작되었으며, 가족들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 역시 확인되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