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7월 29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등재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김해 김씨 |
출생 | 1916년 10월 12일 |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동문리[1] (현 평안북도 철산군 검암리) | |
사망 | 1985년 7월 28일 (향년 68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118-1번지 자택 | |
가족 | 배우자 이정숙, 슬하 4남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선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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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김중호는 그의 형이다.
2. 생애
1916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동문리(현 철산군 검암리)에서 태어났다.일찍이 중화민국 만주로 이주하여 1936년 길림성에서 구국동지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한국광복군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밀 서류를 운반하다가 일본 순사에 체포된 뒤 고문을 당해 손바닥을 활짝 펼칠 수 었는 후유증을 얻기도 했다.
1944년 그는 형 김중호(金仲浩)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귀덕로(歸德路)[2]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 특파 지하공작원 조동린(趙東麟)을 만났고, 그의 인솔하에 안휘성 부양현(阜陽縣) 삼탑집진(三塔集鎭)[3] 소조장(■棗莊)[4]에 있던 한국광복군 징(초)모제6분처[5]를 통해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그해 4월[6]에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었고, 10월에는 중앙군교(中央軍校) 제10분교 한광반(韓光班)을 1기로 졸업했다.
그 뒤 광복군 총사령부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 1945년 1월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귀국하여 장교로 임관, 중령으로 제대하고 경기도 고양군에 정착해 지역 유지로 활동하였으며, 1960년에는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하였다. 하지만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운암 김성숙을 지지하기로 하고, 준비금 5백만 원을 기탁하고 후원회장 및 사무장을 자처했다.
이듬해인 1961년에는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능곡 별정우체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에 선임되고 그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또한 그해 열린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예상자 명단에 올라가기도 했지만 출마하지 않았다.
그 뒤 고양시 덕양구 능곡동에 주물공장을 차렸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118-1번지에 거주하다 1985년 7월 28일 자택에서 지병인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사후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여담
- 말년에 살던 집은 현재 모 원룸이 있는데 독립운동가의 집 명패가 붙어있다.
4. 참고자료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독립운동사 제6권 409, 420, 462쪽
- 광복군 김문택 수기
[1] 인근의 풍천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2] 현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상추시 량위안구(梁園區) 구이더로(歸德路).[3] 현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푸양시 잉저우구(潁州區) 산타지진(三塔集鎭).[4] 현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푸양시 푸난현(阜南縣) 자오좡촌(棗莊村). # 광복군 김문택 수기에 의하면 흙벽돌로 만든 작은 4~5채의 집 마다 둘레에 '棗'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큰 대추나무 10여 그루가 앙상하니 서 있고 다시 그 둘레에는 큰 대추나무 10여 그루가 앙상하니 서 있고……'라고 표현했다.[5] 초모위원회라고도 하며, 정식 명칭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였다.[6] 광복군 김문택 수기에는 한국광복군 초모위원회에 입대한 시기가 1944년 8월 초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