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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20:38:12

김요(통일신라)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요(蕘)
골품 진골(眞骨)
관등 이찬(伊飡)
생년 미상
몰년 887년 음력 1월, 신라 한산주

1. 개요

통일신라 말기의 진골 귀족이자 반역자. 관등은 이찬(17관등 중 2품)이다.

2. 생애

886년 음력 7월, 헌강왕이 사망하고 동생 정강왕이 즉위했다.

김요는 정강왕의 즉위 6개월 만인 887년 1월, 한주(漢州)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즉위에 불만이 컸던 걸로 추정된다.[1] 정강왕은 군사를 보내 반란을 토벌하고 김요를 죽였다.

3. 기타

삼국사기에는 반란을 일으켰다 토벌당했다고 짧게 기록되어 있어서 정강왕 시기까지는 중앙정부가 지방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의외로 김요의 난이 규모가 컸다는 추정도 있다.

김요의 반란을 진압한 정강왕은 4개월 후 승하한다. 정강왕의 후사가 없었던 탓에, 동생 진성여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진성여왕이 즉위 직후 대사면령을 내리고 전국에 1년간 조세를 면세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내렸는데, 김요의 난이 진압된지 얼마안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즉위 2년차부터 숙부인 시중 김위홍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과 놀아났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벽서 사건, 왕거인 무고사건과 같은 부정적인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세면세령이 끝난 후에는 지방에서 세금이 걷히지 않자, 진성여왕은 지방에 세금을 내라고 독촉했더니 889년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후삼국시대가 열려버렸다.
[1] 그가 한주에서 거병한 점을 근거로 원성왕에게 밀려나 명주로 쫓겨난 김주원, 헌덕왕의 견제로 813년~816년 시중을 맡은 것을 빼면 지방관을 전전한 김헌창처럼 중앙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한주로 쫓겨난 진골귀족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