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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14:18:33

김영룡(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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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42년 8월 4일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과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이라고 한다.

1983년 보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7년 보위부장 리진수가 사망한 이후 제1부부장에 임명되어 보위부장을 대행했다.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 김정일에 중요 사안을 제때 보고하지 않은 죄로 함경북도 보위부장으로 일시적으로 좌천되었으나 1991년 8월에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1991년 12월 24일, 조선로동당 6기 19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 199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이루어진 진급명단 중 상장 진급자로 김영룡이 있긴 한데, 1997년 2월 14일, 김정일이 김영룡 소속부대를 따로 현지지도한 일이 있어서 그냥 동명이인인 군인이 당시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 물론 보위부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김영룡 소속부대로 보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일성 사후 흉흉한 북한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 대규모 숙청을 수행했으며 1995년 6월, 안승운 목사 납북을 주도했다는 증언이 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97년 4월에 대장으로 진급했다고 하는데 정작 당시 발표된 대장 진급명단에 김영룡은 없다. 1998년에 대장으로 진급되었다는 증언도 있긴 하다. 보위부 운전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탈북자 구대명은 김영룡이 막판에는 보위부장에 이르렀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1997년, 최룡해를 일시적으로 몰락시켰던 사로청 사건 때 최룡해와 장성택이 연루된 일이라고 우물쭈물하면서 처리를 하지 못하다가 김정일로부터 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반탐국 산하 신흥무역회사가 안기부에 노출되는 실책을 저질러서 1997년 12월부터 중앙당 검열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위에 인용된 월간조선 2020년 2월호 기사에 따르면 심화조 사건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히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무시하다가 노한 김정일이 사로청 사건을 들먹이며 그를 숙청했다고 한다. 1998년 3월, 중앙당 검열 과정에서 집에서 무려 200만 달러의 외화가 나왔고 궁지에 몰린 끝에 독약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보위부 운전수 출신 탈북자 구대명의 증언에 따르면 점심 때 쯤 회의를 마치고 자기 방에서 약을 먹고 죽어버렸고 구급차가 왔지만 결국 죽었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보위부 전체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져 반탐국 국장 김춘삼 등이 체포되어 러시아 간첩이라고 자백하는 소동이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그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룡은 평소에 달러가 어떻게 생긴거냐?라고 능청스럽게 고지식한 사람인 시늉을 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집수색 결과 엄청난 달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1998년 11월 6일, 안기부가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영룡이 숙청당했다고 보고하였다. 사실 이때 검열 때는 살아남아서 복직했다가 2005년 4월까지 버티다가 결국 권총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근거없는 풍문으로 보인다.

2020년 2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도희윤(都希侖, 1967~)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가 해외로 파견된 반체제 보위부 요원 김성일과 연락한 바에 따르면 심화조 사건 당시 토사구팽당할 것을 예감하고 집행 명령을 거부했다가 화가 난 김정일이 당시 중앙사로청위원장이였던 최룡해의 뇌물 및 섹스 스캔들을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사무실에서 음독자살하게 했다고 한다. # 김성일의 대략적인 나이대를 고려하면 그가 함께 주장한 김병하 처형설보다는 신빙성이 높은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영룡의 최후에 대한 정확한 진상은 통일 후에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