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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00:30:29

김세진(열사)

파일:김세진 열사 영정.jpg

1965년 2월 20일 ~ 1986년 5월 3일 (향년 21세)
계명산에서 내려온 푸른 구렁이가
밤마다 품안으로 기어드는
꿈을 꾸고서 김세진군을 낳았대서일까
······
(중략)
······
노루목이며 탄금대며 호암지에서
내가 본 것은 푸른 구렁이들뿐이다.
온몸이 시커먼 독으로 덮여
새파란 불을 뿜는 푸른 구렁이들뿐이다.

<푸른 구렁이>, 신경림

1. 개요2. 일생
2.1. 유년시절2.2. 반전반핵 그리고 반미2.3. 사후
3. 여담4. 참고자료

1. 개요

대한민국열사.

2. 일생

2.1. 유년시절

1965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나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83년에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합격했다.

2.2. 반전반핵 그리고 반미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서 김세진은 학생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1984년 자연대 학생회 부학생회장이 되었고 1986년에는 자연대 학생회 학생회장 및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대표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학생운동에 관여했고 반전운동과 반핵운동 등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재호와 함께 반미시위에도 참여했는데 특히 전방입소훈련에 대한 반대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시위 날짜는 4월 28일로 잡혔다. 김세진은 이 시위의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면서 운동권 지인을 포함한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4월 28일[1] 시너를 준비한[2] 그는 이재호와 함께 신림사거리 부근의 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곧 400여명의 학생들이 전방입소를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진압을 위해 몰려오자 둘은 접근하지 말라며 시너를 몸에 뿌리고 경고했다. 이후 경고를 거듭 무시하고 경찰이 달려들자 분신하였다.

그는 분신 후 한강성심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했다. 소식을 들은 부모가 중환자실로 달려가니 몸은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었으며 전신화상으로 형체조차 알기 힘들었으며 그의 몸은 60% 이상이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사는 "분신한 채로 구호를 외치며 팔을 강하게 흔들어서 그렇게 되었다"며 부모에게 일러주었다. 김세진은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한 후 곧바로 친구 이재호의 상태를 물어보았지만 그 날 밤 혼수상태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3일 오후 5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2.3. 사후

사후 김세진 열사는 화장을 요구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광주시 오포면 판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988년에는 '김세진이재호열사추모사업회[3]'가 세워졌고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이후 그의 시신은 2014년 이천 민주공원묘지로 이장되었다.

3. 여담[4]

4. 참고자료

무서웠어요, 미안했어요
김세진, 이재호는 아직도 묻고 있다.


[1] 이날 벌어진 더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문서를 참조하길 바랍니다.[2] 친구 이정승의 증언에 따르면 김세진은 28일 아침 일찍 나가 시너를 사 왔다고 한다. 뭘 할거냐는 친구의 질문에 김세진은 "짭새들 겁 좀 주려고."라고 답했다.[3] 현 김세진이재호기념사업회.[4] 이재호 문서의 여담과 겹치는 것이 많으니 유의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