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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08 23:40:36

김덕생


1. 개요2. 생애3. 이후 공식적 기록4. 김덕생 행장 관련

1. 개요

金德生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2. 생애

고려시대의 무신이자 역시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인 김운보의 차남이다. 우왕 연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송거신[1]과 함께 이방원을 따랐다. 그러다가 김덕생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낭장으로 있던 태조 4년, 정안군 이방원은 의안대군 이화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표범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낭장 송거신이 표범을 자기 쪽으로 유도하고, 김덕생은 그 표범을 쏘아죽인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방원은 둘에게 말을 선물했고, 태조도 말을 선물한다. 조선왕조 실록 태조4년기사

그리고 김덕생의 생전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조선왕조 실록에서는 추증되기 전 김덕생을 호군(護軍)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추증된 관직인지 죽기전 관직인지는 알 수 없다.

3. 이후 공식적 기록

4. 김덕생 행장 관련

임금님 목숨을 구한 죄로 무사 김덕생이 처형됐다?
김덕생과 관련해서 가장 잘못 알려진 것이 행장이다.

위 기사에 언급된 요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태종이 가마를 타고 후원으로 행차를 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호랑이는 거침없이 태종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김덕생이 번개처럼 뛰어나와 활을 쏘았다. 호랑이는 즉사했다. 김덕생 덕분에 태종은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감히 임금님을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이 가당하냐는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김덕생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김덕생은 변명보다 실력을 보여주었다. 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고 활로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임금님이 위태롭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목이 잘린 시신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대역죄인 김덕생은 정식으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임시로 한양 근처에 묻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억울한 한을 품은 김덕생은 귀신이 되어 세종대왕 앞에 나타났다.
 "소신은 김덕생으로 황천에서 원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제 해골을 고향에 묻게 해주시고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이 원한을 풀게 해주십시오."
 세종대왕은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김덕생의 시신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김덕생의 귀신이 묻힌 곳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서 괴롭다고 하소연해서 근처에서 경작과 방목을 금하게 하고 대신 논밭 60결을 내려주었다.

이 내용은 명백한 역사기록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김덕생의 행장이 김덕생의 후손인 김중태가 송거신의 후손인 전 호조참판 송징은을 찾아가서 행장을 작성해 줄 것을 요구하여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행장 문서에도 있지만, 이 시기 행장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고, 그 음덕을 얻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쓰여졌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숙종대인데, 숙종은 소설책인 육신전을 바탕으로 사육신을 복권한 인물이었다. 즉, 뒤에 작성된 행장이라도 여차하면 먹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행장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정조 10년, 김덕생의 공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이 때 판중추부사 김익이 찬성하면서 한 말이 정확하게 행장의 내용이다. 관련기사

김덕생 행장 내용은 19세기의 민담집인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 등, 특수한 목적으로 쓰여진 행장이 민담집을 통해서 민담처럼 유포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 송거신의 사촌 여동생이 김덕생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인척지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