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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6 16:22:31

김대락(1845)

<colbgcolor=#0047a0> 출생 1845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천전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1]
사망 1915년 12월 11일
중국 만주 삼원보 남산
본관 의성(義城), 내앞김씨
중언(中彦)
비서(賁西)·백하(白下)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대락은 1845년경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의 이름난 유학자이자 을미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그 과정에서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두고 의병을 지휘하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숭상하는 전형적인 선비로 거듭났다.

그러던 1907년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안동에 설립되고 상투를 자른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신학문을 공부하자, 그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대한협회보를 보고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인식한 그는 60세의 나이에 생각을 고쳐먹고 민족 계몽을 추구하는 인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했으며, 학교의 확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1907년에 사랑채를 확장하여 이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하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에 만주로 갔으며, 독립자금마련을 위해 사랑채까지 팔았다고 한다. 현재의 사랑채 건물 일부는 다른 곳에 있던 건물을 옮긴 것이라 한다. 현재는 문화재 및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파일:Neap_3322.gif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김대락은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선영을 지킬 몇 사람을 남겨둔 채 노비를 풀어 주고, 전장을 처분하고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킨 뒤 아들 김월송, 조카 김동삼 등 온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해 남만주 삼원포에 자리잡았다. 이때 그를 따라 삼원포로 망명한 천전리 주민은 총 150여 명에 달했으며,

백하 김대락 선생의 첫번째 여동생 김우락 여사의 남편이자 김락 여사의 큰 형부 되시는 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며 그 또한 그당시 만주로 함께 독립 운동의 길을 떠났다.


이후 1911년 윤 6월 12일 신흥학교 '권유문'을 작성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 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로서의 본질적 취지는 변함없이 고수했다.

또한 그는 삼원포에서 이상룡, 이회영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912년 2월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한 뒤 그해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을 지원했으며, 1913년 2월 삼원포로 돌아온 후 동포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공리회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발표했다.

1915년 12월 11일, 김대락은 만주 삼원포 남산에서 병사했다. 향년 70세. 무덤은 실전되었다. 결국 그의 무덤은 찾지 못했다. 1994년 문중에서는 그의 유해대신 의관을 내앞마을에 묻었다. 장례는 영남유림장으로 치렀다. 그는 생전에 망명 생활을 기록한 백하일기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대락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