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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4:18:13

금릉 김씨

1. 개요2. 설화3. 본관 및 중시조4. 가문의 인물
4.1. 조선 과거 급제자
5. 역대 인물6. 서당7. 가문의 문화재8. 시산제9. 참고 문헌

1. 개요

경상북도 김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국내에서 본관은 금릉이고 성씨는 김씨인 가야계 왕족 씨족이다.

가락국(駕洛國)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인 무득(武得)이 시조인 김씨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기 562년(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23) 대가야(大伽倻)가 신라(新羅)의 장수(將守)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게 정복되어 신라(新羅)와 병합(倂合)되고, 진흥왕(眞興王: 신라(新羅) 제24대왕, 재위(在位) 기간(期間): 540 ∼ 576)이 가락국(駕洛國)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設置)하여 시조(始祖)인 무득(武得)에게 시랑(侍郞) 겸 총관(總管)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 하였다.

2. 설화

시조(始祖) 김무득(金武得)은 신라 김유신의 작은 할아버지로써 금릉 김씨 또한 가야의 후손이기에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등과는 결혼을 금하라고 조상들로부터 구두로 전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에서 개황력을 인용해, 시조 수로왕으로 된 (金卵)에서 태어난 자손들이기에 그렇다.

3. 본관 및 중시조

창성(創姓) 유래(由來)는 김무득이 금릉군에 봉(封)해졌으므로,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본관(本貫)을 금릉(金陵)으로 삼았다.
이후, 세계는 어느 가문에서나 그러하듯이 국가에 여러 난이 겹치고 세보가 상실 되는 등 여러 사유로 구두에 구두로 세보가 전해져 명확하지 않다. 또한 자손을 낳으면 예전에는 병치레를 많이 하여 많이 낳아도 대부분 어린나이에 세상을 등져 유독 금릉 김씨 가문에는 독자들이 많다.

이어, 후손(後孫)들은 고려(高麗) 고종(제23대 왕, 재위(在位) 기간(期間): 1214 ∼ 1260)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ㆍ수사공(守司空)ㆍ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ㆍ서경유수(西京留守) 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오르고 금릉군(金陵君)에 봉(封)해진 김중구(金仲龜)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4. 가문의 인물

4.1. 조선 과거 급제자

무과 병과 12위 김계양(金啓陽) 등 이다.
[ 시험 개요 ]
왕대년 숙종(肅宗) 25, 시험일 1699년 04월 22일, 합격자발표일 1699년 04월 28일
시험종류 식년시(式年試), 시험명 기묘식년문무과방목(己卯式年文武科榜目)
시험장소 모화관(慕華館)
시험관
명관(命官)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최석정(崔錫鼎)
참시관(參試官)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유(李濡)
참시관(參試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남취성(南聚星)
참시관(參試官) 행부사정(行副司正) 이우항(李宇恒)
참고관(參考官) 병조좌랑(兵曹佐郞) 이덕영(李德英)
참고관(參考官)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이여옥(李汝玉)
참고관(參考官)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이도민(李道敏)
승지(承旨)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남치훈(南致熏)
규구 편전 1순(片箭一巡)
문과장원
장원급제 : 이제(李濟)
합격인원 : 40명
무과장원
장원급제 : 음태기(陰泰起)
합격인원 : 76명
시험실시이유 식년시이다.

특이사항
규백육본과 규귀중본에 시험일자와 시험 문제에 이어서 이번 시험합격자중
도중정(都重鼎)은 전시(殿試)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무과 장원을
밝혔는데, 규귀중본에는 무과 장원 음태기(陰泰起) 등 76인을 뽑았다고 하였다.
국중도본에는 시험 문제와 시험관, 무과 장원 음태기(陰泰起) 등 76인을 뽑
았다고 하였다.
장서각본에는 무과에서 음태기(陰泰起) 등 76인을 뽑았다고만 나와 있다.
숙종실록에 이제(李濟) 등 40인을 뽑았다고 나온다.

이 시험의 문무과 단회방목(單回榜目)은 현전하고 있다.

이 방목에 의하면
문과 초시는 무인년 9월 17일(九月十七日), 강경은 기묘년 4월 1일(四月初一日)에,
회시는 10일(同月初十日), 전시는 22일(同月二十二日)에 실시하였고,
문무과 방방은 28일에 하였다.

5. 역대 인물

ㅇ 금릉 김 11세 : 덕산 현감 김 각
ㅇ 금릉 김 12세 : 금산 군수 김자형
ㅇ 금릉 김 13세 : 성균관생 김 옥정(미호 김원행이 서당 현판을 써 주심)
ㅇ 금릉 김 17세 : 몽제 김 장 (병자호란 때 송시열 선생과 강화도 피란 : 묘비 기록)
ㅇ 금릉 김 22세 : 탁계 김상진 (정조 17년 중국 사신)

6. 서당

금릉 김 13세 성균관생원 김 옥정 건립
지재 서당 위치: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만명마을
1,500년경 김옥정(성균관생원)이 건립한 것으로 1,700년경 금릉김씨 종친회에서 재건축하였다.

현판이름은 구(求)를 빼고 지재(止齊)라고 김원행(渼湖)선생이 현판을 써 주셨다.
김원행 선생 가문에도 금릉김씨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고려 때 청산별곡의 전설과 이달선생이 칭송한 금릉김씨의 재실겸 서당인 ‘지재서당’과
충,효를 실천하신 시묘살이 9년 한 몽재(김장) 선생의 묘소와 박성양(藝窓)선생이 초막을 짓고 머물다 간 곳으로
산림학파 선비들이 자연을 즐기며 시를 읊조리던 풍류가 깃들인 곳이다.

근처에 있는 몽재산소 비문에는 병자호란 때 우암 송시열 선생하고
동춘당 동문으로 수학하시고 강화도까지 갔다 온 내용이 비문에 있다.

참고로, 서당은 국가에서 당시에 인정한 것이 몇개소 안되었던 것을 보면
가히 가문은 가야의 왕족 후손임을 알 수 있다.

7. 가문의 문화재

[보은 노송 : (구)천연기념물 제104호 ]

탁계 김상진 할아버지께서 1792년경 중국 사신으로 다녀 오시면서
보은 집 근처에 식재하신 나무 이다.

은진 송씨 역천 송무원 할아버지와 실학을 연구하셨으며
돌아가신 후 은진 송씨 제선 할아버지께서 묘비명을 적어 주셨다.

묘비명에는 김 수로왕의 후예 무위가 당시 금산군에 봉해졌으며
이분이 비조가 되고 후예 평장사 김 중구가 금능군에 봉해져 자손이 본관을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금릉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00호 ]
조선 순조 2년(1802) 문신 김문기 선생의 제사를 위해 금릉 김씨 집안에서 세운 은행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다.

8. 시산제

매년 음력 10월 7일 충북 옥천의 청성 지재 서당에서 시산제를 올리고 있다.

9. 참고 문헌

https://cafe.naver.com/goldhillkim
1. 금릉김씨 세보
2. 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FK137]
3. 규장각한국학연구원[想白古 351.306-B224m-169
4. 고려사절요
5. 고려사
6. 기묘식년문무과방목(己卯式年文武科榜目)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