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19:46:45

그르구르 브란코비치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A500 0%, #FF8C00 20%, #FF8C00 80%, #FFA5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02222"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스테판 라자레비치 주라지 브란코비치 그르구르 브란코비치
토마스 칸타쿠지노스
주라지 브란코비치
제5대 제6대 제7대
라자르 브란코비치 스테판 브란코비치 스테판 토마셰비치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3대 데스포티스
{{{#fff {{{+1
그르구르 브란코비치}}} }}}
{{{#fff
Гргур Бранковић}}}
파일:그르구르 브란코비치.jpg
출생 1416년
브란코비치 가문 영주권
사망 1459년 10월 16일 (향년 43세)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할란다르
재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1439년
아버지 주라지 브란코비치
어머니 이리니 칸타쿠지니
형제 토도르, 스테판, 라자르, 카타리나
자녀 부크 브란코비치(사생아)
가문 브란코비치 가문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3대 데스포티스.

2. 생애

1416년경 코소보와 코파오니크 산지, 타라 강, 모라차 강 상류를 중심으로 페치, 프리즈렌, 부치트른, 즈베칸, 코마라니, 트레프차 시를 점거하던 세르비아 영주 주라지 브란코비치모레아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딸 이리니 칸타쿠지니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도르, 스테판, 라자르, 카타리나가 있었다. 1428년 형 토도르가 사망한 이래, 아버지의 직위 계승자로 간주되었다. 1427년 12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데스포티스에 선임된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오스만 술탄국에 경의를 표했다. 1430년 오스만 제국군이 테살로니키 원정을 벌일 때, 그르구르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분견대를 이끌고 참여해 두각을 나타내, 술탄 무라트 2세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1439년, 무라트 2세는 유럽에서 십자군이 재차 결성되어 장차 발칸 반도로 진격할 것이며, 세르비아 전제군주국도 여기에 가담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무라트 2세는 그 전에 세르비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60,00 ~ 7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뒤 한 분대를 노보 브르도로 파견했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그해 4월 말 또는 5월 초 스메데레보로 진군했다. 아버지 주라지, 어머니 이리니, 막내 형제 라자르는 헝가리 왕국으로 도주했고, 그는 외삼촌 토마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데스포티스를 임시로 칭한 뒤 스메데레보 수비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3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두 사람은 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학살에 직면하는 걸 막기 위해 성문을 개방하기로 했다. 술탄 무라트 2세는 그르구르에게 세르비아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도록 했지만, 얼마 후 마음을 바꿔 에디르네에 있는 자신의 첩실이자 그르구르의 여동생인 마라에게 보냈다.

1441년,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비밀리에 오스만 술탄국에 끌려간 두 아들 그르구르와 스테판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무라트 2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토카트에서 주라지가 헝가리군과 연합해 자신에 대적하는 걸 응징하겠다며 그르구르와 스테판에게 실명형을 선고했다. 마라는 형제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두 형제는 실명형에 처해졌다. 1444년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된 뒤, 그르구르는 형제 스테판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데스포티스 직위를 돌려받은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1456년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사망한 후, 그르구르와 스테판은 실명된 상태였기에 막내 동생 라자르가 새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그러나 라자르가 어머니 이리니의 권한을 박탈하고 가혹하게 대하자, 그르구르는 외삼촌 토마스, 여동생 마라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1458년 라자르가 돌연 사망한 뒤, 국내에 남아있던 스테판이 뒤이어 데스포티스가 되었지만 헝가리 왕국과 보스니아 왕국의 압력으로 물러났고,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토마시의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호메트 2세는 세르비아의 주권자인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여기고, 1459년 6월 군대를 일으켜 스메데레보로 진격했다. 이때 그르구르도 원정군에 함께 했다. 스메데레보가 함락되면서 세르비아가 정식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뒤, 그는 힐란다르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가 1459년 10월 16일에 사망했다.

그르구르는 생전에 부크 브란코비치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이 인물은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충성하면서 그가 보헤미아 왕국, 폴란드 왕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맞서는 걸 도왔으며, 1471년 마차시 1세로부터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선임된 뒤 세르비아로 침투해 오스만 제국군과 맞섰다. 특히 1479년 트란실바니아 지부트 인근 브레드필드 전투에서 세르비아 경기병 대대를 이끌고 오스만군 중앙 대열을 돌파해 승리를 견인했으며, 1481년 크루셰바츠 주변 지역을 급습해 주민 수 만명을 데려와 티미쇼아라 주변에 정착시키는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끝내 세르비아를 탈환하지 못한 채 1485년 생을 마감했다.